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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이 벗겨진 채 동사한 여성

조회수 2017. 12. 15. 10:4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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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  슬그머니 다가오는 죽음 

유성호  법의학자


※해당 글은 미스터리 전문 매거진 《미스테리아》의 고정 코너, 'NONFICTION'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탐사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로 친숙한 법의학자 유성호 교수가 법의학적 관점에서 본 각종 사건들에 관한 기록을 연재합니다. 

옷이 벗겨진 채 동사한 여성


한창 매서운 한파가 몰아닥친 12월  중순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영어 학원으로 향하던 대학생이 간밤에 내린 눈 때문에 빙판이 된 좁은 골목길을 아슬아슬 걸어가던 중이었다. 골목길 가운데에 흰 눈으로 덮인 무언가가 어슴푸레 보였다. 가까이 다가간 대학생은 자칫하면 넘어질 뻔했다. 엎드린 사람이었다. 흰 눈이 미처 다  덮지 못한 검은 머리카락과 빨간색 브래지어가 똑똑히 보였다. 대학생은 만져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비명만 질러댔다. 아침 댓바람에 집 앞으로 뛰어나온 다른 노인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옷이 전부 벗겨진 상태에서 브래지어만 착용한 채 엎드린 여성의 시체였다. (중략) 


“외지 사람이 벌인 짓일게야”, “동네 가로등이 너무 어두우니까 나도 우리 딸을 버스 정류장까지 데리러 가야겠어” 등 겁에 질린 말들이 좁은 골목길에서 오갔다.

경찰은 여성의 사망 전 행적을 조사했다.
 시신이 발견되기 전날 사망자는 직장 동료와 밤늦게까지 술자리를 가지며 제법 취했지만 동료들은 집 앞 좁은 골목 직전까지 택시로 데려다주었다고 증언했다. 택시에서 내린 후 불과 약 10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시체가 발견된 점을 미뤄 볼 때, 범인은 골목에 숨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적확한 사망 원인을 알기 위하여 부검이  시행되었다. 나체 상태로 발견된 사람이 여성일 경우에는 특히 더 냉정하게 검사를 하게 된다. 전신에 눈이 덮여 있었기 때문에 증거의 수집이 어려웠지만, 생식기와 항문 주위를 살펴보고 유전자 검사를 시행하였다. 성폭행의 흔적은 없었다. 무릎과 이마에 새로 생긴 피하출혈이 있었으나 넘어지면서 발생한 손상으로 추정되었고, 치명적인 외형적 상처로 보이지는 않았다. 시반(屍斑, 시체 얼룩)은 일반 시신보다 더 선명한 붉은색을 띠었으며, 피부의 털세움근이 수축하거나 굳어버리면서 오톨도톨해져 닭살(鵞皮, cutis anserina)처럼 보였다.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지만 부검을  조심스럽게 진행했다. 심장의 왼심실의 혈액이 선홍색이었으며, 위의 점막에서 붉은 출혈(Wischnewsky Spot)이 확인되었다. 


혈중알코올농도는 0.21퍼센트로 만취 상태였다.  여러 소견을 종합건대 그의 사망 원인은 저체온사, 즉 동사(凍死, Death by Freezing)였다. (중략) 

저체온사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저체온(低體溫, Hypothermia)은 체열 생산의 감소, 체열 발산의 증가 또는 양쪽 모두의 작용으로 생긴다. 건강한 사람의 경우 방한복을 잘 챙겨 입으면 –60℃에서도 장시간 견딜 수 있어 동사하지 않는다. 방한복 등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라면, 체열 발산이 많아져서(열을 많이 잃어서) 체온 조절 기능의 한계를 넘길 때 저체온증에 걸린다.* 체온 저하가 진행되면 생체의 효소** 반응이 감퇴하고, 결과적으로 체열 생산 기능도 저하하고 저체온이 더 심해진다. 이어 중요한 장기가 기능을 잃고 신진대사 이상과 같은 전신 장애가 나타난다. 더 진행하면 동사한다.

실제 동사의 발생 조건을 살피면 당연히 기온이 낮을수록 동사하기 쉽다. 그러나 기온이 0℃ 이하로 내려가지 않아도 다른 조건들이 합쳐지면 동사할 수 있다. 


특히 몹시 취한 사람이 최저기온 5℃인 밤에 동사하거나, 최저 온도 10℃ 정도인 밤에 술에 취한 채 비를 맞고 자다가 동사한 경우도 있다. 첫 번째 예로 들었던, 직장 동료가 골목까지 데려다준 여성은 술에 취한 상태에서 집 근처라는 안도감 때문에 길에 쓰러져 잠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알코올, 즉 술을 먹게 되면 몸이 훈훈해져서 동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 몸은 열을 붙들어두려고 하는 성질이 있다. 추울 때 사람들이

더 창백하게 보이는 이유는 열의 손실을 줄이기  위해 혈액을 피부로부터 먼 곳으로 방향을 돌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코올은 피부의 혈관을 확장시킨다. 이는 혈류를 증가시키므로 따라서 열 손실도 늘어나게 된다. 추운 환경에서 이는 신체에게 최악의 조건이 된다. 즉 알코올은 열손실을 촉진하기에 동사도 재촉하게 된다. 첫 번째 사망자의 경우 알코올 때문에 정신을 잃고 급격하게 사망했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모순 탈의(矛盾脫衣, Paradoxical Undressing) 

또는 이상 탈의


(중략) 그렇다면 왜 위의 여성은 동사의 과정에서 옷을 벗게 되었을까? 법의학자들에게 오랫동안 의문이었던 이 현상은 모순 탈의(矛盾脫衣, Paradoxical Undressing) 또는 이상 탈의라고 정의되었다. 추운 겨울에 동사를  하였음에도 동사자의 약 15~20퍼센트는 전신의 옷을 벗게 된다. 일본의 통계에 따르면 동사자의 50퍼센트가 최소한 옷의 일부를 벗는 현상이 관찰되었다. 즉 모순 탈의는 추운 겨울에 동사 전 스스로 의복의 일부 또는 전체를 벗는 현상이다. 우리 뇌에서 체온을 담당하는 시상하부(視床下部)가 저체온 때문에 일으키는 이상 흥분 현상으로 설명하지만, 아직까지는 명확한 기전이 밝혀지지 않았다. 위에 열거한 체온31℃∼34℃(마비기)의 상태에서 의식이 혼탁해지면서 환각으로 인해 발생하는 현상으로 추정한다. 그럼에도 앞선 두 사건과 같이, 동사한 사람의 옷이 벗겨진 상태라면, 특히 사망자가 여성이라면 수사기관에서는 심각한 범죄 상황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게 된다.

모순 탈의에 대해서는 2014년 6월 발견된 전세모 그룹 회장 유병언 씨의 시신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 유병언 씨의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소문이 돈다. 그의 윗옷이 들려 있었다는 사실에서 혹시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체온 조절에 취약한 당뇨병 환자였던 유병언 씨가 기온이 내려간 밤에 저체온사(동사)를 하는 와중에 부분적인 모순 탈의가 발생했을 가능성으로 설명하고 있다.

‘비일상적인 사고’가 아니다


11월이 시작되어 찬바람이 불면 법의학을 하는
 사람들은 불안해진다. 연말 늦은 술자리 때문에 술에 취해 길에서 잠이 드는 사람은 없는지, 또 추운 날씨에 경제적으로 곤궁하고 병든 사람들이 잘 버틸 수 있는지 걱정이 커진다. 동사 또는 저체온사에 대해 히말라야 등 산악 지대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든가 눈밭을 헤매는 등의 사고로만 여기지 않았으면 한다. 이 추운 날씨에 개인적 노력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세상의 시련과 질병 때문에 더 많이 보호해야 할 사람들이 없는지, 주위를 둘러봐야 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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