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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상사 : 개헌 정국을 여행하는 시민을 위한 안내서

조회수 2018. 1. 8. 11:3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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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한 설계 없는 분권은 모두를 망친다

개헌 정국


2018년, 곧 다가올 지방선거는 문재인 정권의 남은 4년을 좌우할 전기가 될 것이다.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때를 같이하여 개헌이 추진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자유한국당은 대선 당시 공약을 파기하고 동시 개헌에 반대하고 있지만, 여론은 대체로 동시 개헌에 우호적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번 개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분권’이라고 이야기한다. 박근혜 탄핵과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제왕적인 대통령의 권한을 분권해야 한다는 것이다. 절대자 한 사람에게 몰린 권력을 분산시켜야 한다는 건 마땅한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권력은 분산되는 게 낫다는 당연해 보이는 말조차도 마찬가지다.


역사적인, 사회적인 맥락에 따라 서로 다른 분권이 추구되는 것이 당연하다. 분권이란 말 자체도 너무 많은 개념을 함축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말하는 개념에 대해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는가?

사전적 의미는 알고 있지만….



분권에 대한 오래된 논쟁


정치권은 ‘분권’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주로 이원집정부제를 제시한다. 국민 직선으로 선출하는 대통령과 의회가 선출하는 총리를 따로 두고, 외치는 대통령, 내치는 총리가 담당하는 방식이다.


분권이 좋은 정치의 출발점이라는 생각은 심지어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공화정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정치사상가들은 다수의 민주정과 1인의 군주정은 모두 중우정이나 참주정으로 타락하기 쉽다고 생각했고, 민주정과 군주정을 섞어 권력을 나누는 권력 분립을 고안했다. 오늘날 ‘삼권분립’의 기본이다.


하지만 당시의 권력 분립은 말하자면 ‘권력을 여러 곳에 나누었다’는 수준에 불과해 오늘날과 같이 서로 다른 권력기관이 서로를 견제하는 형태는 아니었다.


특히 입법/사법/행정의 삼권 분립은 몽테스키외에 이르러서야 등장한, 상당히 근대적인 개념이다. 사실 고대와 같은 원시적인 형태의 권력 분립은 설계가 정교하지 않아 힘의 쏠림 등으로 인해 지속되기 어렵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이원집정부제도 비슷한 맥락에서 비판받을 수 있다. 이원집정부제는 ‘외치’와 ‘내치’로 두 권력자의 역할을 나누고 있지만, 이 구분은 주먹구구식이다.


FTA는 외교 협상이지만, 내수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선 내치에 더 가깝다. 결국 정교한 설계 없이 권력자를 두 명 둘 뿐이라는 반박도 만만치 않다. 이 불분명한 분권이 과연 마찰 없이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이원집정부가 아니라 라이벌이 될지도 모른다

또 해당 제도를 하나씩 뜯어보면 대통령의 권한은 허울뿐이고 사실상 거의 모든 권력이 총리에게 넘어간 것을 볼 수 있다. 좋게 보자면 선진국형 내각제 도입이라 할 수 있지만 나쁘게 보면 사실상 6월 항쟁 등으로 국민들이 쟁취했던 직선제는 유명무실해지게 된다. 


차라리 내각제로의 완전 이행이라면 몰라도 지금과 같은 이원집정부제 안은 혼란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사실상 최고 지도자에 대한 투표권을 빼앗는 셈이니 말이다.


 

지방분권 논쟁


행정부로부터 국회로의 권력 분산만큼 중요한 또 한 가지 분권이 있다. 지방분권이다. 한 유력 차기 대권 정치인이 이번 개헌을 통해 ‘연방에 준하는 지방분권’을 이루어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연방이란 단어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은 역시 미국이다. 하지만 미국이 처음부터 연방의 형태였던 건 아니다.


미국 건국 과정에서 각 주는 개별 주의 문제에 다른 주가 간섭하기를 원치 않았으며, 이에 따라 연방정부도, 연방대법원도, 화폐를 통제하는 중앙 체계도 없었다. 연방은 중앙집권제도의 부재로 인한 여러 혼란을 겪고 사후에 등장한 개념이다.


이미 대한민국 정부라는 중앙집권적 정치체제가 존재하는 가운데, 각 도(道)에 주 정부 급의 권한을 부여하는 것을 보며 어쩌면 당대의 연방주의자들은 무엇하러 그런 헛고생을 하느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연방주의자 논고』의 저자 제임스 메디슨은 중앙집권화된 연방국가가 필요한 이유로 ‘파벌’을 들었다. ‘파벌’이란 공동체의 이익에 상충되는, 그들만의 정념과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집단을 말한다.


메디슨은 파벌의 잘못된 정념은 작은 공화국에서 퍼지기 더 쉬우므로 (마치 ‘작은 사회’처럼) 이를 견제하기 위해 큰 공화국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 순서가 반대가 되었지만, 오늘날의 지방분권 논쟁에서도 같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메디슨이 제기한 작은 공화국의 문제는 오늘날의 지방자치단체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작은 사회는 부패하기 쉽고, 지방 토호와 관료는 유착하여 사익을 도모한다. 염전노예 사건, 장례차량 통행료 강요 사건, 마을 주민의 교사 성폭행 사건 등은 이런 문제가 엽기적인 형태로 터져나온 것이다. 이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

국가의 힘이 닿지 않는 어떤 지방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영화 ‘이끼’

중앙집권화된 근대국가와 분권화된 독립국가가 조화된 체계는 시민에게도 두 가지 역할을 함께 요구하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모순이 일어난다. 


미국의 경우, 연방 전체에선 더 많은 표를 얻은 앨 고어나 힐러리 클린턴이 주 차원에서 덜 지지받았다는 이유로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했다.


동성결혼 등은, 분명한 답이 있는 인권 차원의 문제지만 주 정부에 의해 금지되기도 한다. 전라도는 동성혼이 가능하지만 경상도에선 처벌받는 사회를 우린 감당할 수 있을까.


 

맥락과 흐름


단순히 ‘내각제가 더 좋다’거나, ‘지역자치가 보장될수록 좋다’ 같은 명제(?)들로는 부족하다. 좀더 깊은 접근을 위해서는 맥락을 들여다봐야 한다.


미국이나 독일 등에서 연방 수준의 지방자치가 발달한 맥락이나, 한국에서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된 맥락, 지금과 같은 형태의 분권이 이뤄진 맥락을 빼놓고, 그냥 ‘선진국에서 쓰는 좋은 제도’를 이식한다고 그 제도가 여기에도 뿌리내리리라 기대하긴 어렵다.

언제나 끔찍한 혼종이 나타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잊지 말자

하지만 이런 맥락을 포착하는 건 쉬운 과업이 아니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는 왜 민주정도 군주정도 불완전한 정치제도라 생각했으며 분권을 추구했는가? 미국은 어떻게 연방제를 채택했으며 연방제를 어떻게 합리화했는가? 당대의 시대상과 전후 정치사상의 흐름을 들여다보지 않고는 이런 질문에 답을 내리기 어렵다.


뿐만 아니다. 미국이 연방제를 채택한 이유와 이를 뒷받침한 정치사상에 대해서는 『연방주의자 논고』 같은 저작을 읽어봄으로써 그 맥락을 대강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왜 소수뿐 아니라 집단 속의 다수도 파벌을 형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는 알기 어렵다. 이건 길게 거슬러올라가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민 모두가 참여하는 민주정조차 중우정으로 타락할 수 있다는 사상과 맞닿아 있다. 『연방주의자 논고』를 읽는 것만으로는 이런 사상사적인 맥락을 알 수 없다.


현대 정치제도와의 비교는 더욱 어렵다. 왜 우리는 대통령을 세 명 두는 대신 삼권 분립과 견제를 채택했는가. 한국의 지방자치제도가 만들어진 역사는 미국이나 독일의 연방제와 어떻게 다르며, 그 차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가이드 없이 혼자 고찰할 만한 문제가 아니다.


이런 ‘맥락’을 잡기 위해서는 가이드가 필요하다. 과거의, 그리고 과거와 현재 사이의 맥락을 밝히는 안내서. 정치사상사를 다룬 책들이 그 안내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여러 사람이 모여 누구는 그리스, 누구는 마키아벨리, 누구는 루소, 누구는 마르크스 하는 식으로 정리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이래서는 흐름이 끊기기 마련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현대 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정치사상사의 흐름을 한 화살로 꿰뚫을 순 없을까. 대가 한 사람이 정리한다면 좋겠으나,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한 30년쯤 걸릴 것이다.


그 일을 실제로 해낸 것이, 앨런 라이언의 『정치사상사』다.

크고 아름다운 두께를 자랑하는 정치사상사



앨런 라이언?


앨런 라이언은 정치 이론가이며 정치사상가이고, 근대 자유주의 발달에 대해서는 특히 권위 있는 학자다. 이름값을 끌어쓰자면, 옥스퍼드대 뉴 칼리지 학장이었으며 옥스포드대 정치학 교수, 프린스턴대와 스탠퍼드대 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30년간 한 책을 썼다. 그리고 이 책에서 인류 정치사의 흐름을 조망했다.


저자는 사상가들의 주장을 대단히 꼼꼼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에, 정치사상사를 처음 접하는 사람의 개론서로서도 유익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개론만 다루는 건 아니며, 그는 과거의 철학자들이 그 시점에서, 어떤 맥락 속에서 그런 주장을 했는지를 고찰한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처럼, 이 책 속에선 과거의 철학자들이 그들끼리, 그리고 현대의 가치관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눈다.

철학자에 의한 독재는 물론 심지어 일종의 계급 사회까지 주장한 플라톤의 『폴리테이아』를 보며 느꼈던 당혹감은, 『국가』란 정치사상서가 사실 극도로 탈정치적이란 맥락을 저자가 짚어줌으로써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기독교가 지배하던 중세 정치사상사 속에서 성직자 폭군을 살해하는 것도 적법하다’는 인상적인 주장이 등장하는 걸 보면서는, 과거의 정치사상이 오늘날의 것과 완전히 단절된 게 아님을 실감하기도 한다.


이게 『정치사상사』가 정치사상의 흐름을 말하는 한 방식이다. 미국 건국사를 얘기하다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언급하고, 플라톤을 얘기하다가 현대 대의제를 이야기한다.


책 안에서 사상가들은 끊임없이 싸운다. 우리는 그 싸움을 높은 곳에서 조망하며 과거의 정치사상사를 하나의 흐름 속에 받아들임은 물론, 오늘날을 위한 것으로 발전적으로 고찰 계승하게 된다.


번역자의 이름에도 주목할 만 하다. 이 책은 고 남경태 선생의 마지막 작업물로, 750쪽 아홉번째 줄까지가 그의 작업이다. 『종횡무진 서양사』 『종횡무진 한국사』의 저자이기도 한 그는 39권의 책을 쓰고 번역서까지 포함해 모두 145권의 책을 작업한 대가다.


대중과의 만남도 활발해 MBC 라디오에서 <타박타박 세계사>를, 팟캐스트로 <팟캐스트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진행하기도 했는데, 출판사에서 처음부터 번역자를 점찍어놓고 계약했단 얘기도 있다.


보통 이런 인문서는 딱딱한 내용과 번역 탓에 읽기가 버거워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덕분에 호흡이 편한 축에 속한다. 출판계에서 오래 활동하며 학술 서적을 펴내면서도, 대중과 함께 호흡하길 멈추지 않았던 고인의 마지막 작업물답다.

53세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진 고 남경태님.



정치사상사를 보는 눈


우리는 우리 사회가 상당 수준 공고화된 민주주의를 이룩했다 생각했고, 경제나 고도화된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 체제 같은 다른 문제에 집중해왔다. 누구나 말했듯 “문제는 경제”인 시대라 생각했다.


이 책이 말하듯, “현대의 민회는 전문가인 행정부 공무원들의 안내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법률상의 민주주의가 사실상의 관료 전제 내지는 전문가 독재로 쉽게 변질될 수 있다”. 이 점을 견제해야 한다고 다들 부르짖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더 근본적인 질문에 아직 대답하지 않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헌법 제1조. 우리는 이게 직관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대강 알고 있다. 국민에게 주권이 있고, 공공선을 추구한다는 뭐 대충 그런 얘기.

너무나 유명한 문구

이것은 아주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 과거 아테네는 “의사 결정에서 균등한 몫을 원했”으나 “모든 사람의 이익이 균등하게 고려되는 것”에는 신경을 덜 썼다. 외국인이나 여성에 대한 차별, 노예제가 자연스러웠다.


오늘날의 자유민주주의는 “비전제적이고, 자유로우며, 대중적인 혼합정체”의 형태를 띠고 있다. “대통령 또는 총리가 이끄는 행정부, 수백 명으로 구성된 의회”가 존재하며, 유권자에겐 적극적인 주도권 대신 통치자들을 퇴출시킬 수 있는 힘이 주어진다. 정치 참여의 기회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반면 과거의 민주주의와 달리 오늘날의 자유민주주의는 보통 사람들에게 지적, 정신적 자유와 직업 선택의 자유를 보장한다. 개헌에서도 권력구조 못잖게 강조되어야 할 가치다. 이 점에서 자유민주주의는 명백히 진보했다.


물론 자유민주주의가 궁극적인 정치 체제인 것은 아니다. 지방분권은 분명히 시민 모두가 정치에 참여하고, 모두가 서로를 알고 지내는 폴리스만이 정체가 될 수 있다는 고대 그리스식의 ‘국가’를 닮은 데가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고대 그리스가 이것이 걱정했듯 중우정으로 전락하지 않는 장치들을 고민해야 한다.


단순히 머릿수로 밀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한 공동체가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충족시킬 것일지 합리성과 과학적 시각을 토대로 파악하고 해결해나가는 ‘숙의’와 같은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이런 장치가 보장되지 못한다면 지방분권은 ‘파벌’로 인해 파멸할 뿐이다.


민주주의의 개념은 대단히 복잡하며, 그것이 정치적 민주주의나 참여 민주주의만을 뜻하진 않는다는 것도 기실 명백하다. 반면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 수준은 ‘빨갱이 때려잡는 것’부터 ‘다수결’에 이르기까지 일차원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


민주’와 ‘공화’를 어떻게 추구할 것인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떻게 지배할 것인가? 이것은 정치사상사의 근본적인 질문이다. 늘 거기 있던 질문이다. 다가올 개헌 정국에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질문이 또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묻고 또 대답해야 한다.


우리가 마주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다. 헌법 제1조, 민주공화국의 의미 말이다. 민주주의란 무엇이었던가? 그리고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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