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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건설 정책의 역사가 그리는 '시민을 위한 3기 세종시'

조회수 2018. 5. 15. 16:1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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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지방선거 특집: 이춘희 세종특별시장 인터뷰

이승환(ㅍㅍㅅㅅ 대표, 이하 리): 2012년 세종시장 선거에 갑자기 나오셨어요. 원래 행정만 하고, 정치에 뛰어들 생각은 없으셨던 건가요?


이춘희(세종특별시장, 이하 이): 그랬죠. 정치에 뜻이 없었고, 지역 연고도 없어서 준비도 안 된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당에서 마땅한 인물을 구하지 못해 요청이 왔던 거죠. 처음에는 완강히 거절했어요.


리: 행정고시 출신으로 차관까지 하셨으니 이제 더 올라갈 자리가 없다는 생각에 한번 욕심 부려볼 만했을 것 같은데요.


이: 정치에 관심이 있었다면 국회의원 출마를 할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2008년에 차관을 마친 후에도 행정에 전념했지, 정치는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어요. 그 이후로는 건설산업연구원장을 하다가, 김완주 전라북도지사가 새만금 개발 문제를 도와달라고 했어요. 본인 말씀으로는 십고초려를 하셔서 새만금 경제자유구역청장이 되었어요. 건설교통부에서 도시개발, 국가균형발전 업무를 해왔으니 업무적으로 유사한 측면이 있고, 2006년 초대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청장으로 세종시와 같은 큰 프로젝트를 했던 경험이 있으니 이 경험을 살리면 좋겠다 하셨겠죠.

출처: 이말년웹툰
간손미 간손미 신나는 노래

리: 세종시는 없던 것을 새로 설계한 거지만, 새만금은 누군가 싸 놓은 똥을(…) 정리하는 차원 아니었나요? 


이: 새만금도 사실상 시작 단계였어요. 방조제 건설은 됐지만 그게 목적은 아니거든요. 안의 땅을 농업용지, 산업용지로 개발해야 하는데 그게 시작되기 전이었어요. 또 제가 고향이 전북이거든요. 전에 모셨던 강동석 장관님도, “고향을 위해 제대로 봉사한 적이 없으니 해 보면 좋겠다”며 강하게 권유하셨어요. 그래서 갑작스레 내려가게 된 거죠.


리: 어느 쪽이 편했나요?


이: 연구원이 훨씬 편하죠. 익숙한 일이기도 하고, 책임질 일도 많지 않았으니까요.


리: 새만금을 해 보시니 세종시와 비교하면 어떤 차이가 있었나요?


이: 세종시는 노무현 대통령의 적극적인 지지와 지원이 있었죠. 하지만 새만금은 적극적인 뒷받침이 있던 일은 아니었어요. 이명박 전 대통령도 자기 주도로 개발하는 건 좋아하는데, 남을 지원하는 데는 썩 적극적이지는 않았어요. 또 제가 이명박 전 대통령과 그 주변 사람들이 싫어했던 세종시를 만든 사람이었으니까요. 서울시장 시절에는 “탱크를 동원해서라도 막겠다”고 했을 정도였죠.

출처: 한겨레21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리: 당시에는 세종시 반대 의견이 더 많았죠? 


이: 찬성이 40% 정도, 반대가 60% 정도. 물론 최근엔 찬성이 조금 더 많습니다. 당시 서울에서는 기득권을 뺏긴다는 생각이 컸을 테니까요. 노무현 대통령은 그런 면에서 용기가 있던 분이죠. 반대가 큰 프로젝트를 강력히 추진하는 게 쉽지 않거든요. 국가의 균형발전을 위한 특단의 대책이라는 확고한 철학이 있으셨죠. 당시 저는 1급 공무원이 되자마자 충청권 신행정수도 건설이란 임무를 받아서 위치, 규모, 도시계획 등 실무를 관장했어요.



“단면이 아름다운 삶을 살고 싶었다”


리: 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대학까지의 삶이 굉장히 화려한데, 행정고시 출신이시다 보니 이 부분이 물음표로 남아 있어요. 학창시절에 기억나는 게 있으신가요?


이: 초등학교 5학년 때, 고모를 따라 광주로 전학을 가면서부터 객지 생활을 시작했어요. 그렇게 8년을 생활하다 보니, 고3 때 영양실조에 걸려 쓰러졌어요. 몸이 다 망가지고 불면증에 시달릴 정도가 되니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했죠. 그때 갑자기 공무원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원래 이과였는데, 고려대 법대 행정학과로 진학했어요.


리: 정말 시대에 어긋나는 발상이시네요(…)


이: 1970년대 초반, 유신 시기였죠. 젊은 사람들은 기성세대를 보며 썩었다는 얘길 많이 했어요. 저 개인적으로도 몸이 안 좋으니까 굉장한 허무주의에 빠졌어요. 그때 읽었던 책이 러시아 작가들의 1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허무주의를 표현한 작품들이었어요. 문득 든 생각이 누구의 생이든 그 생의 단면이 아름답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 같다, 내 생은 어느 시점에서 쪼개 보더라도 그 단면이 아름다웠으면 좋겠다는 거였어요. 그러면서 공직을 선택해 사익보다 공익을 추구하는 삶을 사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죠.


리: 굉장히 준비된 답변 같은데(…)


이: 아뇨, 당시엔 정말 심각했어요. 간, 콩팥이 완전히 망가질 정도로 안 좋은 상황이었던지라.


리: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이 많은 시대였다고 하셨는데, 시장님은 어떠셨나요?


이: 말을 먼저 못 걸 정도로 수줍은 성격이었어요. 반장 한번 해 본 적도 없고요. 그 당시엔 데모가 아주 심했죠. 특히 1975년 4월에 굉장히 큰 데모가 있었어요. 그 후 긴급조치 7호, 9호가 발령됩니다. 일부는 도서관으로 숨고 일부는 잡혔는데 전 도서관으로 숨은 쪽이었어요. 그러다 4학년 때 행정고시에 합격했어요.

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75년 4월 시위 이후, ‘긴급조치 7호’로 고려대학교에는 전례 없는 단일 학교 대상 휴교령이 내려졌다.

리: 굉장히 빨리 합격한 편이죠? 당시에는 행정고시 공부를 어떻게 했나요? 


이: 그렇죠. 재학 중 합격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죠. 여유 있는 친구들은 절에서 공부를 하기도 하는데, 전 여유가 없으니 그냥 학교에서 살다시피 했지요. 딱히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고요.


리: 사모님과는 합격 전부터 연애하고 계셨나요?


이: 대학교 3학년 때, 선배를 통해 만났어요. 선배는 소개해줄 생각이 없었다고 했지만 아무래도 처음부터 음모가 있었던 것 같아요. 거의 이틀에 한 번꼴로 만났어요. 배우자는 나중에는 학교 선생님이 되었어요.

출처: 이춘희 공식 블로그
대학에서의 목표가 건강 회복, 졸업 전 취업, 인생의 짝 찾기였는데 모두 성취한 인생의 승리자…

리: 친구들이 운동하자고 꼬시진 않았어요? 


이: 1975년에 있었던 긴급조치 7호, 9호가 워낙 강력했습니다. 5명이 모이기만 해도 잡아갔어요. 운동권이 사실상 붕괴했죠. 그래도 데모를 하는 사람은 있었지만요.


리: 고3 때 그런 상황에서도 고려대 법대에 들어가고, 행시도 2년 만에 패스했어요. 본인이 머리가 좋다고 생각하시나요?


이: 제가 나온 광주일고가 서울대를 130-140명씩 보내던 곳이에요. 제가 썩 잘 풀린 케이스는 아니었죠. 행시도 따지면 거의 3년 만이고요. 체력이 모자라니 공부하는 시간을 많이 잡을 순 없었고, 대신 집중해서 했던 것 같아요.



스물여섯 사무관, 한국 건설 정책의 역사가 되다


리: 그렇게 공무원이 되셨는데, 첫 월급은 얼마였어요?


이: 첫 월급이 11만 원. 하숙비가 8만 원, 한 학기 등록금이 20만 원 하던 시절이니 그때는 공무원 월급이라는 게 박봉이었죠. 1978년 5월, 5급 사무관으로 임관을 했어요. 건설부에 배치를 받고 군대를 갔다가, 1981년에 복직한 이후 실질적인 업무를 시작한 건 주택정책과였어요. 1980년대 주택문제는 굉장히 심각했지요. 일이 워낙 힘들긴 했지만, 그만큼 제대로 배웠죠.


리: 어떤 일이 가장 기억에 남으시나요?


이: 채권입찰제라고 아시나요? 그때는 분양가 상한제가 있어서 분양가와 실제 시세가 차이가 있었어요. 그러면 분양만 받으면 돈을 버는 거잖아요. 그래서 그 차액을 채권으로 사도록 했어요. 그 돈으로 임대주택을 지었죠. 제가 사무관일 때 입안했던 거예요. 임대주택법도 제 손에서 나왔고요. 제대로 된 임대주택 정책을 제가 처음 만든 거였죠. 지금도 공무원 사회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들이 사무관이에요. 물론 윗사람들에 의해 채택이 되어야 하지만요. 사무관으로 14년을 일하고 진급되었어요. 진급이 늦은 편이지요.


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시기는 주택 정책이 아파트 등을 통해 해결되는 굉장한 시기 아니었나요?


이: 전두환 시기의 가장 중요한 정책은 물가 안정이었죠. 이를 통해 경제 체질이 굉장히 강해졌지만 그래서 필요한 투자를 제대로 안 했어요. 주택 수요가 매년 40만 호 정도였는데, 연평균 23만 호밖에 건설 안 했죠. 그러니 1987년도에 집값이 폭발했어요. 그래서 노태우 대통령이 후보 시절 200만 호 주택 건설을 공약했었죠. 1989년도에는 집 문제 때문에 14명이나 자살했습니다. 그때로써는 굉장히 심각한 상황이었으니 필요한 정책이었죠. 1988년부터 1992년까지 265만 호를 건설했습니다. 그때 건설된 게 분당, 일산, 평촌, 산본, 중동 5대 신도시였어요.

출처: 동아일보
이때부터 존버만 했어도(…)

리: 200만 호 건설이 지금까지도 화두가 되는 게, 부동산 정책에서 수요가 중요한가, 공급이 중요한가 하는 문제 때문인데요. 


이: 전두환 정부 때는 세금을 때리고 금융을 조여서 수요를 줄여왔는데 처음 공급 부문 정책이 나온 거였어요. 당시 주택 문제에서 많은 역할을 했던 사람이 박승 장관 같은 분이에요. 그때 제가 분당 신도시를 입안하고 일산까지 맡게 됐어요. 그게 인연이 되어서 신행정수도 건설할 때 노무현 대통령께 추천을 받은 것 같아요.


리: 당시에 분당, 일산을 맡았다는 건 어마어마한데요. 왜 분당과 일산이었을까요? 그리고 어떤 점에 주안점을 두었나요?


이: 우선 서울에서 20~30km 거리에 대규모 도시 건설이 가능한 곳이 분당, 일산이었어요. 분당은 개인적으로 오랫동안 검토했던 지역이고, 일산은 박승 장관께서 말씀하셨어요. 서울의 무게중심이 강북에서 강남으로 옮겨가던 상황인데, 분당만 개발하면 균형이 깨진다는 생각이셨죠. 분당이 10만 호, 일산이 6만 호 정도 들어섰지요.


리: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었죠.


이: 그래도 이후에 물량이 공급되며 집값이 잡혔죠. 90년대 내내 안정이 됐어요. 90년과 2000년 집값을 비교해 보면 오히려 100에서 98로 떨어졌어요. 분당과 일산 모두 5년 만에 도시의 틀을 갖추었는데, 다른 나라에서는 믿지도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죠.


리: 어마어마하게 좋은 평가를 받으셨겠어요. 그런데 왜 승진은 느리셨던 거죠?


이: 나이 때문에 ‘자넨 아직 젊잖아’하면서 밀렸죠. 썩 기분이 좋진 않았지만, 이해 못 할 정도는 아니었어요. 일찍 시작한 만큼 여전히 젊었거든요.


리: 그런 거대 도시를 만든다는 게, 굉장히 재미있었을 것 같아요.


이: 그런 의미에서 공직은 굉장한 매력이 있어요. 어떤 직업 못잖은 보람이 있죠.

출처: EA
오늘의 지식: 공무원이 되면 현실에서 심시티를 할 수 있다(아님)

리: 그때는 어디 사셨어요? 


이: 과천에 살았어요. 경제부처들이 과천청사로 옮길 때였거든요. 과천에서 한 30년 살았죠.


리: 정작 본인은 땅값 상승의 수혜를 별로 못 받으셨군요(…) 도덕을 버리면 엄청 돈을 벌 수 있는 일 같은데요. 어디 땅 좀 사놔라 한다든가…


이: 맡은 업무가 도시, 주택이다 보니 금기시되는 부분이죠. 게다가 구체적인 정보를 알아야 가능한 건데, 정부 정책은 전국적으로 대부분 같이 적용되죠. 설령 정보를 안다 해도 그러면 안 되고요.


리: 4급 승진 후엔 어떤 일을 하셨나요?


이: 1993년부터 3년 동안 주미 대사관에 파견 근무를 했어요. 그때 한덕수 총리가 대사,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공사를 하셨고, 정의용 안보실장도 모시고 같이 일했어요. 외교부 직원들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을 협업하기 위해 갔었죠. 1996년에 국내로 돌아왔고, 1997년 말 외환위기가 터진 후에 그해 대선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청와대로 들어가게 되었어요. 경제수석실에 건설교통비서관이 있는데, 거기서 행정관을 맡게 되지요.


리: 3급으로 본격적으로 엘리트 라인을 걷게 된 건가요? 좋은 일이지만 하필 IMF, 국난에 처한 상황이었어요.


이: 귀한 경험을 했어요. 경제수석이 강봉균 수석이었는데, 일을 굉장히 잘했습니다. 경제 관료 중 최고가 아닐까 싶어요. 강봉균, 진념 팀이 정말 기민하게 대처를 했어요. 중요 의사결정은 강봉균 수석이 맡고, 경제팀에서는 진념, 이헌재 같은 분들이 각 부처를 조정하여 실행하면서 10년 이상 걸릴 거란 얘기가 많았지만 3년이 채 안 돼서 극복해냈어요.


리: 시장님이 보시기엔, 무엇이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을까요?


이: 해야 할 일을 신속하게 한 거예요. 해야 할 일이 뭔지는 다들 알아요. 점검하고 두드리다 타이밍을 놓치죠. 당시 대기업이 평균 부채 비율이 500% 정도 됐는데 갑자기 이자가 폭등하니 당해낼 방법이 없는 거예요. 은행 입장에서도 기업이 망하면 부실채권만 생길 뿐이에요. 그래서 토지공사가 기업이 가진 땅을 사면 기업은 그 돈으로 은행 빚을 갚았어요. 토지공사는 땅값을 은행으로부터 빌려서 치렀고요. 돈의 위치만 달라진 거지요. 기업 입장에서는 땅을 줄이는 대신 부채도 줄어든 것이고, 은행은 채무 상환을 받으니 건전성이 높아지는 것이고요. 이해관계를 따지면 굉장히 복잡한 일인데 1주일도 안 돼서 결정했어요. 어떤 일을 특별히 잘해서 위기가 해결된 게 아니고, 수없이 많은 일을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했기 때문에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죠.

출처: 국토교통부
누구보다 빠른 남자…

리: 외환위기를 넘긴 후에는 어떤 일이 기억에 남으세요? 


이: 경부고속철도 일도 맡았고… 제가 맡기 전까지 6년 동안 공정이 43% 진행된 걸 1년 동안 60%까지 끌어올렸어요. 일을 천천히 하는 걸 못 보는 성격이죠. 대통령을 설득해서 경부고속철도 2단계 사업과 인천공항 2단계 사업을 계획보다 1년 앞당겨 시작했죠. 장비나 인력이 다 흩어지게 될 테니, 바로 이어서 시작해야 한다고 설득을 했던 거예요. 또 당시 철도와 전력 쪽의 파업 문제가 심각했는데, 이쪽도 조율했고요.


리: 잠시 주택 쪽과 떨어졌군요?


이: 그 후에 주택도시국장으로 다시 복귀했는데, 그해 말 대통령이 새로 뽑히면서 인수위에 참여했어요. 정부에서 볼 때는 주택 문제가 늘 심각한 문제거든요. 대통령 취임 직후에는 신행정수도 추진 업무까지 맡게 되었어요. 대통령, 총리를 직접 모시고 일을 하게 된 거죠. 고건, 이해찬, 한명숙, 한덕수 총리. 그렇게 세종시와의 인연이 시작되었어요.

명언의 주인공과의 만남

리: 고건 총리는 정말 행정의 달인이던가요? 


이: 제 스타일은 아니에요. 어려운 의사결정을 잘 안 하는 편이에요. 심사숙고하긴 하는데 타이밍을 놓치는 일이 많아요. 이해찬 총리는 그런 면에서 아주 훌륭한 분이죠. 의사결정이 빠르고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아요.



“입지, 이름부터 다 내가 만든 도시”


리: 이해찬 총리와의 인연으로, 세종시장 후보에 천거되신 건가요?


이: 반대로 제가 이해찬 총리를 모시고 왔죠. 전 주민분들께 권유받았고요. 행복도시건설청장을 할 때 토지매수업무를 진행했어요. 2,230만 평을 1년 이내에 거의 다 샀습니다. 그러면서 주민들에게 이런 말을 했어요. “여기가 정말 좋은 도시가 될 거다. 이 돈 갖고 어디 다른 데 가지 마시고, 여기에 정착하시라.” 그랬더니 주민들이 ‘그럼 청장님도 은퇴하면 여기 와서 살 거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리: 솔직히 세종시에 살 생각은 별로 없었죠?


이: 아니요, 있었어요. 이 도시는 제가 입지, 이름부터 다 했어요. 도시에 대한 애정은 누구보다 클 겁니다. 시장과 국회의원을 뽑아야 하는데 국회의원감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해찬 총리를 설득했죠. 노무현 대통령도 돌아가셨는데, 그 의리를 생각해서라도 우리가 나서야 한다고요.


리: 굉장히 정치적인 내용인데요. 노무현 대통령과는 친하셨나요?


이: 친하고 말고의 문제는 아닌 것 같고… 토론을 좋아하던 분이에요. 친밀하게 느껴지는 관계가 형성되었지요. 또 세종시 자체가 노무현 대통령의 작품이란 생각이 있어요.

토론을 좋아하던 이 시대의 쿨가이 노쨩

리: 세종시를 만들면서 힘든 점이 많았을 텐데요. 가장 힘든 점은 어떤 게 있었을까요? 


이: 건설할 때부터 찬성보다 반대가 많았던 프로젝트였어요. 위헌결정 이후에는 후속대책을 만드느라 굉장히 고생했고요. 풍비박산이 난 상태에서 행정중심복합도시란 형태로 다시 일으켜 세우기까지 피 말리는 싸움이었죠.


리: 정권이 바뀌면 뒤집힐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은 없었나요? MB가 뒤집은 것들도 워낙 많았고요.


이: 많았죠. 함부로 뒤집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여야 합의를 통해 법을 만들었어요. 그럼에도 이명박 대통령 때 수정안, 백지화 파동을 겪었어요. 이 도시를 행정도시 대신 기업도시로 만들려는 법안을 냈는데 국회에서 부결됐어요. 여당 내에서 반대하는 사람이 나왔거든요.


리: 누구였나요?


이: 박근혜 전 대통령, 당시에는 의원이었죠. 충청권 민심을 고려해야 하는 입장이었으니까요. 이런 사업은 시작하기도 어렵지만, 시작한 것을 중단하기도 어렵거든요. 충청권에서 똘똘 뭉쳐 원안사수 투쟁을 했어요. 정치권도 그에 반응한 거죠.

작년 사회여론연구소의 조사, 세종시가 참 정계 흐름에 따라 고생이 많다

리: 그런데 이후에 2012년 세종시장 선거에선 떨어지셨어요. 


이: 준비과정에서 부족한 점이 많아서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어요. 도시에 대한 애정,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의리를 위해 나왔던 것으로 생각해주시면 좋겠어요. 사실 그해 대통령 선거가 있었거든요. 시장선거 못지않게 중요한 선거였으니, 이를 위해 당을 결집하는 일도 중요했다고 생각했어요. 중앙당의 일을 많이 해야 하는 이해찬 의원을 대신해 시당위원장을 맡았어요. 세종시당이 제대로 된 시도당의 모습을 갖추도록 하는 데 많이 신경 썼죠.


리: 그런데 또 패했어요. 본인의 패배와 문재인 후보의 패배 중 어느 쪽이 더 가슴 아팠나요?


이: 문재인 대통령이 진 게 더 가슴이 아팠어요. 이명박 대통령의 실정이 커서 정권교체의 열망이 있다고, 이길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죠.


리: 본인의 선거가 끝난 날, 문재인 후보의 선거가 끝난 날, 각각 뭘 하셨나요?


이: 그렇게 요란스러운 사람이 못 돼서 그냥 바로 집에 가서 잤어요. 제 선거가 끝났을 때는 11시쯤 돼서 패배 선언하고, 푹 잔 다음 날 낙선사례를 했어요. 사실 선거 전에는 세종시에 당세가 잘 형성이 안 되어 있었어요. 대선을 준비하면서 시당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갔지요. 이해찬 의원은 제가 선거운동을 하는 걸 보며 시장 선거보다 더 열심히 한다며 감동했다고 하셨어요.

출처: 이춘희 공식 블로그
2012년 고배를 마셨던 이춘희 시장은 2년 후 제2대 세종특별시장에 당선된다.

리: 행정수도 개헌 이야기도 하셨는데, 정말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이: 당연히 가능하고, 꼭 해야 할 일입니다. 2004년 위헌 결정은 조금 무리가 있는 결정입니다. 우리나라는 성문헌법 국가인데 관습헌법에 따라 위헌이라고 했죠. 개헌 과정에서 확실히 정리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대통령 개헌안을 보면 수도는 법률로써 정한다고 되어 있어요. 불문헌법 문제를 정리하고 국가기관의 추가 이전, 수도 이전의 필요성이 대두될 수도 있다고 명시하고 있지요. 다른 정당도 다들 행정수도 공약을 했습니다. 기록이 다 남아 있으니 없던 일로 넘어갈 순 없지요.


리: 국회 분원 문제도 있습니다. 행정수도만 해도 현재의 수도권이란 큰 세력과 싸워야 하는데, 분원까지 생각하면 적이 더 늘어나는 셈인데요. 한국이란 나라가 서울을 중심으로 효율적으로 뭉쳐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 처음부터 청와대와 국회 모두 옮기자고 시작한 일인걸요. 효율성 이야기는 잘못 아시는 점이 있는데, 도시에는 규모의 경제라는 게 있습니다. 어느 정도 규모까지는 효율이 높아지지만 그 이상을 넘어서면 오히려 효율이 떨어집니다. 시민 한 사람을 케어하는 비용이 서울이 세종보다 훨씬 더 많이 들어갑니다. 예를 들어 주택도 서울은 20-30억까지 하잖아요. 다양한 서비스가 있지만 그 서비스가 모두 비싸요. 한곳에 모여 좋은 것도 있지만, 어느 정도를 넘어서면 한계효용체감이 작용해요. 서울은 그런 단계에 와 있는 거고요.


리: 미국만 해도 실리콘밸리, 한국도 강남 판교 등으로 산업이 집적되며 우수한 인재가 몰리고, 그로 인해 나타나는 효과가 있잖아요?


이: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세계적으로 경쟁하는 산업은 효율성이 높아야 하지만 국민들을 위한 행정 서비스는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위헌 결정 이전, 국회 분원은 진지하게 논의되던 상태였다

리: 국회 분원 같은 경우엔 문제가 좀 다르지 않나요? 


이: 그건 위헌 결정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상황이고, 헌법 개정으로 위헌 문제가 해소되면 국회를 통째로 옮기는 게 궁극적으로는 맞다고 생각해요. 물론 결정의 주체는 세종시장이 아니라 국회가 되어야죠.


리: 문재인 대통령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가요?


이: 유추해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인데, 대통령 개헌안을 보면 국가기관의 추가 이전 필요성, 수도 이전의 필요성이란 표현을 썼거든요. 대통령의 의지가 강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리: 시장 임기 4년 동안 많은 일이 있었잖아요. 잘한 일이 많으신 것 같으세요, 잘 못한 일이 많으신 것 같으세요?


이: 그래도 잘한 일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이 도시가 이젠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어요. 6년 전 출범할 때 인구가 10만이었는데, 이젠 30만이에요. 신도시 계획대로 늘고 있죠. 둘째로 행정수도 개헌, 국가기관 추가 이전, 인프라 조성 등에도 많은 진척이 있었어요. 내부적으로 신도시와 구도시, 도시와 농촌 간의 격차 해결을 위해 청춘 조치원 사업이라는 도시재생 사업을 하고 있는데,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농촌에서는 로컬 푸드 사업을 하고 있는데 이것도 전국에서 가장 잘 운용된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요.

출처: 티브로드
착실히 성장하고 있는 세종시.
출처: 경향신문
가장 젊은 광역지자체이기도 하다.

리: 도시 개발로 인한 땅값 문제 등은 어떻게 해결해나갈 수 있을까요? 


이: 신도시는 73㎢의 땅을 이미 확보했어요. 땅값의 오르내림에 영향을 받지 않을 정도이기 때문에, 도시개발에 지장이 될 건 없습니다. 다만 농촌지역 개발에 대해선 그런 문제가 나올 수 있어요. 고민거리 중 하나가 난개발인데, 이를 막기 위한 성장관리방안 프로그램이 법적으로 근거가 마련되어 있어요. 다만 다른 곳에선 적용하지 않았는데, 우리 시가 이걸 처음으로 적용을 했지요.


리: 다른 곳에선 왜 적용하지 않았을까요?


이: 우선 민원이 발생할 수 있고, 다른 곳에선 이런 문제가 일어난 경우가 없었어요.



3기 세종시는 시민이 참여하는 “시민주권특별자치시”로


리: 다음 선거에서 다시 당선된다면, 이거 하나는 꼭 하겠다는 게 있을까요?


이: 행정수도 세종시를 완성시키는 게 가장 큰 명제죠. 여기에 새로운 지방자치의 모범을 보이고 싶어요. 자치분권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어요. 첫째는 중앙정부의 권한을 지방으로 ‘분권’하는 것이에요. 현장성이 강한 사무 등은 원칙적으로 지방에서 해결하자는 거죠. 이건 전국적으로 한꺼번에 실행할 수 있는 일이죠.


리: 또 하나는…


이: 둘째는 주민자치에요. 많은 부분을 주민들에게 맡겨서 주민들이 결정하고 실행할 수 있게 하는 거죠. 이건 전국적으로 한꺼번에 실행하기 힘든 일이에요. 우리는 인구 30만 정도 규모에, 광역과 기초를 겸한 구조, 전국 각지에서 여러 주민이 모여 아직 기득권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점 등 이런 주민자치의 모범을 보일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해요. 시민들의 시정 참여가 일상화된, 시민주권특별자치시 세종을 만들자고 하고 있어요.


리: 같이 일한 분 중 쟁쟁한 이름이 많이 나왔는데 ‘이분에겐 이런 것을 배웠다’하는, 기억에 남는 게 있으신가요?


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분은 역시 노무현 대통령입니다. 참여정부란 말을 하셨죠. 공무원들은 윗선의 결재를 받고 국민들에게 이해를 받는 구조로 일을 하잖아요. 노무현 대통령은 그 반대였어요. 안건을 가져가면 국민들에게, 전문가들에게 물어봤느냐고 하셨죠. 시민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결정하자는 것이었죠. 그렇게 다 알려서 의견을 수렴한 후에 대통령께 보고하는 거죠. 참여민주주의에 대해 큰 충격을 받았고, 실제로 장점도 많았어요. 정책의 품질이 상당히 높아지더라고요.

틈만 나면 균형발전을 이야기했다

리: 건설 쪽에서 오래 일하시면서 부동산도 굉장히 민감하게 느끼셨을 텐데요. 문 대통령의 부동산 정책에 대해 시장을 무시하고 억누르다 독박 쓰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향후 부동산이 어느 쪽으로 갈 것 같으신지요? 정부 정책이 유효할 것 같으신가요? 


이: 유효하고, 옳은 방향입니다. 부동산으로부터 얻는 투자 이익이 크면 클수록 투자를 많이 하게 되는데, 국가 경제 차원에선 지극히 안 좋은 현상입니다. 거래 자체를 막는 게 아니라 과소비를 막는 거예요. 부동산이 활황이 될수록 실제로 가난하고 집 없는 사람들이 고통을 받습니다. 주택정책의 포커스는 소외계층, 어려운 사람들에게 맞춰져야 해요.


리: 하지만 부동산에 있어 정부 개입은 풍선 효과만 낳는다는 주장도 있지 않습니까.


이: 이상 수준으로 오르는 집값을 잡기 위해서는 해열제 투입이 필요해요. 참여정부의 부동산 정책도 실패한 게 아니라 필요했던 것이고, 그게 없었다면 집값은 더욱 뛰었을 거예요. 지금의 부동산 상태는 문재인 대통령 때문에 생긴 게 아니에요. 정책의 효과가 나타나는 데는 몇 년씩 걸려요. 지난 정부에서 부동산을 풀어놓으면, 그 결과가 다음 정부에 미치는 거죠. 단기적인 대책으로 현재의 부동산 상황을 정리할 수는 없어요. 심리적인 효과는 있지만, 실제 법률이 제정되고 시행되어야 효과가 나타나지요.

출처: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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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분당, 일산 신도시를 시작하셨는데요. 거품이란 얘기가 신도시마다 나오지만, 결국 다 오르더라고요. 동탄도 공급 과잉이 아닐까 하는 얘기가 나옵니다. 신도시 1기 책임자로서, 앞으로도 신도시가 건설되어야 할까요? 


이: 앞으로 대규모 신도시는 건설될 필요가 없어요. 1980년대는 매년 3.5%의 가구 증가가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멈춰 있어요. 소득도 예전엔 7~8%씩 증가했는데 이젠 그런 성장이 일어나지 않아요. 수급상황을 볼 때도 주택의 양이 굉장히 많아졌어요. 일시적으로, 특히 특정 지역에서는 집값이 많이 오를 수도 있지만 전국적으로, 장기적으로는 그렇게까지 뛸 수가 없어요. 1980년대에는 공급이 부족한데 갑작스러운 경제성장으로 주가가 200~300에서 1,000까지 올라가면서 그게 부동산 소비로 연결됐던 거죠.


리: 아랫세대는 윗세대와 다른 세상에 살겠네요. 자제분들은 지금 어떤 일을 하시나요? 공부는 어떻게 시키셨어요?


이: 딸 둘, 아들 하나인데 다들 결혼하고 직장생활을 하고 있어요. 공부는 썩 잘하는 편은 못 됐고. 우리 부부보다는 못 하더라고요. 아이들에게 맡기는 편이었는데, 알아서 하라고 했더니 알아서 놀더라고요. 외고에 가려고 했는데, 못 가게 했어요. 중고등학교는 보통 교육이니까 특별히 재능이 있는 게 아닌 이상 특목고에 가는 게 마뜩잖았죠. 게다가 외고에 진학하면 멀리 차 타고 가야 하는데, 집 앞이 바로 학교인데 뭐 하러 그러나 했어요.

공직자 윤리를 떠나, 사실은 만사 귀찮았을 뿐이다(…)

리: 인생에서 변곡점이 몇 번 있었을 것 같은데요. 생각나는 걸 세 가지 뽑아주신다면요?


이: 첫 번째는 고3 때 아파서 쓰러졌던 겁니다. 진로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공직을 선택하게 되었으니,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 계기였죠. 두 번째는 역시 노무현 대통령을 만난 것이었습니다. 매년 초에 봉하마을을 찾아 뵈어요. ‘세종시는 노무현입니다’라는 말을 쓰기도 했고, 기일엔 모여서 문화제 같은 것도 해요. 세 번째는 선거에 나오게 된 것이요.


리: 여러 선택 중 가장 잘한 선택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이: 공직을 선택한 것이요. 인생을 행복하게, 보람 있게 보낼 수 있었던 게 그 덕분인 것 같아요.


리: 공직을 준비하는 분들에게 해드리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이: 잘했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다만, 단지 안정된 직장이라서 선택했다면 그건 아닌 것 같고, 공익을 위해 한평생 살겠다는 마음으로 택한다면 후회 없을 거로 생각합니다. 유능한, 사명감 있는 젊은이들이 도전해볼 만한 직장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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