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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프 시술 수기: 용기를 설치할 수도 있다면

조회수 2019. 12. 20. 17:5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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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지긋지긋해졌습니다. 또 임신 걱정을 하다가요. 그래서 루프 시술을 받기로 했습니다.

자궁과 월경과 임신과 섹스를 얘기하는 글들을 읽을 땐 어쩐지 다음 단락에 일어날 일이 미리 걱정되어 조마조마한 분들도 계신가요. 결국은 읽기를 주저해본 경험도 있으신가요. 저는 자주 그렇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얘기를 읽으면 가슴이 아니라 아랫배가 아프지요. 

이 글에선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건강하게 잘 지냅니다. 타들어가는 마음으로 ‘착상혈과 생리의 차이’를 검색하며 새벽을 보낸 적이 있을 소녀들에게 바칩니다.


지긋지긋한 피임의 역사

하루의 일정 중 피임약 먹기를 지나치지 않는 분들께 언제나 존경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뭘 해도 되실 분들이에요. 저는 알람을 맞춰놓아도 까먹기가 일쑤였습니다. 


제 몸은 그닥 까다롭지 않아서 어떤 브랜드의 피임약이든 무던하게 잘 맞았지만, 흡연자이기 때문에 서른다섯 살 이후로는 부작용의 위험이 급격하게 올라간다는 점도 걱정스러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일찍 루프 시술을 고려하지 않은 이유는, 비쌌기 때문입니다. 콘돔과 경구피임약 구매에 드는 몇 년간의 금액을 더하면야 루프가 저렴하지만 한 번에 큰돈을 지출할 용기가 나지 않았고, 가끔 루프 가격을 검색해 볼 때는 꼭 사치를 부린다는 마음이 들어 포기했습니다. 


섹스의 빈도를 생각하면 그냥 생활비에 포함시키는 게 마땅한 데도요. 확실한 피임이 주는 안정감이 일상의 다른 부분을 얼마나 수월하게 하는지를 고려하면 이만큼 남는 투자가 없다고 봐도 좋고요.

왜 항상 나는 다 아는지,
왜 항상 나만 다 아는지.

항상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았던 피임의 역사를 어떻게든 바꾸고야 말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올해 6월 말의 일입니다. 계기랄 게 따로 있었던 건 아니에요. 만난 지 얼마 안 된 파트너에게 또 한 번의 인내를 발휘하다가, 문득 천년의 생을 버틴 고목처럼 피곤해졌습니다.

왜 항상 나는 다 아는지, 왜 항상 나만 다 아는지. 상대를 앉혀놓고 질외사정은 왜 피임이 아닌지, 월경 중 임신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 콘돔의 피임률은 얼마나 되는지, 피임약은 어떤 원리로 임신을 막는지, 피임약을 언제 먹고 언제 휴약하는지, 그러는 동안 어떤 부작용이 얼마의 확률로 일어날 수 있는지 설명하는 날 없이는 연애를 시작할 수 없는 건지.

그날은 아주 건조한 태도로 화를 냈습니다. 왜 미리 몰랐는지요. 이 모든 것을요. 갑자기 한국 공교육의 실패와 섹스를 쉬쉬하는 한국 문화의 잘못에 대해 중언부언하기 시작한 파트너가 딱 입을 다물 때까지 말했습니다. 그에게는 창피하고 조금 억울한 통화이기도 했겠습니다. 그래도 미안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어요.


준비: 나의 루프를 찾아서

한 2년 전부터 월경량이 좀 버거울 정도로 늘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월경주기는 전보다 짧아졌는데, 월경 기간은 길고(짧게는 일주일에서, 길게는 이주일 가까이 생리대를 썼습니다), 피가 한 번 쏟아지면 어떤 오버나이트로도 안심이 안 됐습니다. 


월경의 양상도 좀 귀찮았는데, 처음 피가 비치고 일주일이 넘도록 월경이 시작되지 않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그 기약 없는 기간에 괜히 낭비된 생리대가 많았죠. 빨래를 한 번도 안 해도 되는 월경 기간을 보낸 기억은 거의 없고요

미레나가 월경과다증의 치료 방법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저는 별다른 옵션을 고민하지 않고 곧장 산부인과로 갔습니다. 우선은 월경과다 진단을 받는 게 중요했죠. 미레나는 평균적으로 30만 원에서 35만 원 선인데, 보험 적용을 받는다면 가격을 십만 원대까지 낮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널리 시술되는 호르몬 루프는 미레나, 제이디스, 카일리나 세 가지가 있는데요. 셋 다 자궁경부를 통해 삽입하는 T자 형태의 루프로 작용원리가 똑같고, 전반적인 효과와 부작용의 양상도 비슷하지만, 스펙으로 볼 때는 포함된 호르몬의 용량, 기구의 크기, 피임 지속기간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당일: 일상생활이 가능하다는 것의 의미

왜 그런 기대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시술을 마치고 나면 맘 졸였을 엄마와 동생을 데리고 뭐도 먹고 수다도 떨고, 하루가 저물 때는 허리를 꼿꼿이 편 채 본가로 돌아가는 엄마를 배웅도 하리라고, 어쩌면 밤에는 우편물을 확인하고 집청소도 좀 할 수도 있을 거라고요. 


혹여 오늘의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없었을 거고, 결과적으로 엄마의 방문은 귀하고 반갑고 즐거운 모녀 상봉의 의미가 더 컸던 것으로 판명 날 거라고요.


이후: 부작용과 변화

2주 전인가 영등포에서 오래 못 만난 친구들과 늦은 점심을 먹었는데요. 서로의 최근 소식을 따라잡고 보니 미레나를 한 친구, 제이디스를 한 친구, 그리고 카일리나를 한 저 이렇게 세 명이 나란히 앉지 않았겠어요. 시기로 치면 제가 제일 나중인 셈인데, 하나같이 너 이제 무적이 되었구나 축하를 해주어 뿌듯했습니다. 


시술을 받은 시기도 각자에게 나타난 부작용도 제각각이었지만, 서로가 겪었던 일과 겪게 될 일에 대해 공유하고 보니 제가 상대적으로 무난하게 적응한 편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어요. 


저도 크고 작은 부작용을 겪지 않은 것은 아니에요. 루프 시술 이후 지금까지 제게 일어났던 변화들을 순서대로 적어봅니다.


용기를 설치할 수도 있다면

이상한 일이죠. 몸에 설치된 작은 기구 이전과 이후로, 세상을 대하는 자세가 완전히 달라지기도 한다는 게요. 루프 시술 이전에도, 저는 밤 산책을 나가고 싶을 땐 나가자고, 택시를 타고 싶을 땐 타자고, 궁금한 사람의 방에서 아침을 맞을 기회가 생긴다면 그런 순간은 놓치지 말자고 다짐하며 지냈습니다.

그런 다짐을 철회하고 싶어지는 날에는 조금 더 힘을 주어 말했죠. 여성으로서 겪을 수 있는 부조리와 폭력의 길고 긴 리스트에도 불구하고 보폭을 줄여서 걷지는 말자고요. 그런데 시술 이후에 저는 이전의 보폭도 좁았다는 걸 느껴요. 저는 얼마나 두려움에 익숙해져 있었던 걸까요? 용기란 이렇게 쉽게 설치되기도 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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