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투어 마을 참견 3 <인재 많은 마을에 이야기도 많아라, 김범진 삼촌의 거로 마을>

조회수 2019. 10. 28. 19:3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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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에 나오지 않는 마을, ‘거로 마을’. 고려 중기부터 내려온 이름이지만, 행정상으로는 옆 동네까지 다 합쳐 ‘화북2동’이에요. 거로 마을에서는 마을과 주민들의 기억을 소재로 문화 예술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지원하는 ‘문화공간 양’이 있어요. 동네 어르신과 수개월에 걸쳐 마을 곳곳을 답사하고 그림지도를 만들고, 마을 일상 웹툰을 연재하며, 문화공간 양에 머무는 예술가들이 거로 마을의 과거와 현재를 기록할 수 있게 도와오고 있답니다.

‘문화공간 양’의 운영자, 김범진 관장과 김연주 기획자가 들려주는 거로 마을 이야기로 함께 떠나볼까요! 

Q. ‘거로’라는 이름은 언제부터 있었는지

행정 이전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마을은 자연 마을이라고 해요. 옛날부터 화북2동의 화북천 옆 마을을 ‘거로’라고 불렀는데, 원래는 ‘클 거(巨)’에 ‘길 로(路)’를 써서 ‘큰 길이 난 지경’이란 뜻이었어요. 그러다 조선 시대에 관리와 유학자를 많이 배출하며, 학덕이 높은 원로가 많이 사는 마을이란 의미로 ‘어른 로(老)’를 쓰기 시작했으니, 대략 1800년대쯤이네요.
Q. 마을토박이인지
김연주 기획자
저는 서울에서 공공 미술 분야의 기획 일을 하다가 김범진 관장과 ‘문화공간 양’을 꾸리기 위해 2013년 제주로 내려왔어요. 거로살이 7년 차입니다.

김범진 관장
거로에서 태어난 토박이는 아니지만, 대대로 외가가 거로에 있어서 어렸을 때부터 이곳에서 놀았어요. 방학하면 부모님은 저를 외할머니댁에 맡겨두었죠. 지금 문화공간 양이 바로 외할머니 집이에요. 여기서 조금 올라간 곳에 있는 폭낭을 보셨나요? 그 자리가 ‘바람길’로 통해서 여름날에 나무 그늘에 앉으면 참 시원해요. 날이 무더울 때는 폭낭 아래서 마을 회의를 했다고 해요. 회의를 마치면 사람들은 할머니 댁으로 내려왔어요. 그러면 할머니는 술을 내오고, 저는 여러 어르신 앞에서 노래를 불러드렸죠. 음주에는 가무가 필요하잖아요. 어른들이 용돈을 쥐여 주셨던 기억이 나네요.
Q. 문화공간 양에서는 어떤 문화 예술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지원하는지

일종의 아카이빙 작업인데요. 거로 마을 역사에는 몇 개의 단절선(斷切線)이 있습니다. 우선 4·3으로 마을이 전부 불타버린 일이 있는데, 그때가 바로 1949년 1월 7일입니다. 남김없이 타버려서 마을 사람들이 돌아왔을 때 원래 살던 집의 위치를 찾을 수 없었다고 해요. 1980년대에 지금의 연삼로에 해당하는 산업 도로가 생겼고, 이 길이 그야말로 마을을 관통했습니다. 길을 내기 위해 김·현·양 씨 종갓집과 마을 공회당을 밀었고, 하나의 구역이었던 거로 마을은 갈래갈래 쪼개졌죠. 공간이 나뉘었고, 마을의 주민들 역시 나뉘게 되었어요. 이러한 단절을 극복하기 위해 마을의 양영선 어르신은 20년에 걸쳐 ‘거로 마을지’를 만들었어요. 저희 역시 문화‧예술을 매개로 마을이 가진 고유한 이야기에 닿고, 그 안에서 길어 올린 의미를 이웃과 후대에 전달하는 거지요.

Q. 역사를 기록하는 작업과는 어떻게 다른지

예를 들어 ‘마을지’는 객관적인 사실과 자료에 근거하잖아요. 저희는 주관적인 기억을 담고 싶어요. 예술가들과 협업해 마을 어르신의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듣고 수집하는 건 그 때문이에요. 마을을 경험한 사람들의 기억을 사실에 비추어서 맞다, 틀리다 여부를 판단하지 않고, 역사를 이루는 하나의 조각으로 모으는 거죠. 공동체는 기억을 통해 이어진다고 생각해요. 공간은 바뀌고 사람이 드나들어도 공동체의 내력이 이야기로 공유된다면 끊이지 않고 흘러갈 수 있어요. 어르신들이 하나둘 떠나고 새로운 주민이 공간을 채워도 거로 마을이 이어질 수 있도록 문화공간 양은 ‘기억의 저장소’ 역할을 하려고 해요.
Q. 마을 여행 팁
마을을 하나의 공간으로 본다면 거로 마을은 남은 것보다 사라진 것이 더 많은 마을이에요. 4·3으로 옛 모습과 기록이 모두 삭제됐고, 그나마 재건하고 복원한 것이 산업 도로가 놓이면서 대부분 사라졌죠. 그럼에도 면면히 흐르는 학식 깊은 마을의 저력 같은 게 있습니다. 4·3과 전쟁의 폐허 위에서 마을 청년들은 스스로 연극단을 조직했어요. 어르신들은 공회당에서 학습당을 열었고, 아이와 여성을 가르쳤죠. 마을의 주민들은 문화‧예술 활동으로 마을의 위기를 이겨내려 한 것이죠. 연삼로 변의 CU 거로 마을 점은 예전의 마을 공회당 자리예요. 마을을 거닐면서 눈으로 감상하는 데서 나아가 여러 감각을 사용해 지난 역사와 흔적을 느껴보면 어떨까요?
김범진 관장✕김연주 기획자, 거로 마을 가이드 5
양의 안내를 들어라, 문화공간 양
거로 마을을 여행할 땐 가장 먼저 문화공간 양에 들러 가이드를 받아보세요! 마을 지도를 펴놓고, 차츰 어떻게 둘러보면 좋을지 샅샅이 안내받을 수 있답니다.
김범진 관장 외가의 가옥을 고쳐 만든 전시실을 비롯해 공간 한편에 놓인 마을 목욕탕의 무쇠 욕조 또한 이곳의 볼거리!

[오픈 시간] 

상시 관람

목~일

낮 12시~오후 6시

예약 관람

월~일

오전 10시~오후 8시 


‘당’과 ‘충’의 기묘한 만남, 당충대
당충대는 거로 마을의 옛 당이 있던 자리로, 나무 그늘이 깊어 잠시 쉬어가기 좋은 곳이에요. 제주에서 마을 당은 ‘신들의 고향’이라 불러 신앙의 터전 역할을 했답니다. 조선 시대 제주의 민간 신앙을 약화하고, 유학의 기틀을 잡기 위해 당을 없앤 때가 있었어요. 이후 다른 마을에는 당이 부활했지만, 유학으로 이름난 거로 마을은 유일하게 그러지 못한 곳이에요. 당충대의 ‘충’이 유교 색을 띈다는 점에서 마을의 옛 특색을 느낄 수 있답니다.

꼬닥꼬닥 걷기 좋은, 능동산
마을 북쪽에 자리 잡은 능동산은 느긋하게 거닐기 좋은 동산이에요. 능동산 앞 ‘한라산 국청사’를 찾아 그 뒤로 올라가면 금방 정상에 도착하게 된답니다. 멀리 한라산을 배경으로 귤밭이 이어지고, 능동산 너머로는 화북동 풍경이 펼쳐져 도심 속 장관을 만끽할 수 있어요~

그 천에 이름이 많은 이유, 화북천
거로 마을을 오른쪽에 끼고 화북포구 방향으로 흐르는 화북천은 예로부터 마을의 귀한 자원이었어요. 말이 물을 마시던 곳, 여자와 남자가 각각 목욕하던 곳 등 용처에 따라 이름을 달리 붙여 다옥내, 몰푸리, 단물, 원남소, 섯내 등 화북천을 부르는 이름이 다양하답니다.

4·3의 흔적을 찾아, 4·3만 평 부지
문화공간 양의 두 가이드로부터 적극 추천을 받은 ‘흔적 여행’ 장소, ‘화남경로당’. 화남경로당 건너편에 있는 주차장이 바로 그곳이에요. 옛날 이 일대는 모두 밭이었는데, 4·3사건 때 마을이 전소된 후 온 마을 주민이 모여 이곳 1만 평 밭 둘레에 4~5m에 이르는 성을 쌓고, 4·3사건이 끝날 때까지 버텼다고 해요. 참담하던 시절, 마을 사람들을 지켜준 내력이 깃든 곳에서 제주 4·3사건의 의의를 되새겨 보는 건 어떨까요.

[주소]

제주 제주시 거로중길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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