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과 슈바이처는 '이것'의 천재이기도 했다?!

조회수 2019. 12. 4. 07: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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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랑

인류 역사 상

가장 똑똑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아인슈타인

밀림의 성자

슈바이처


슈바이처와 아인슈타인은 인류에 위대한 업적과 교훈을 선물한 위인인데요. 의술과 물리학의 천재라는 점 외에도 이들에게는 한 가지 더 공통점이 있다는 것 알고 계신가요?


이들은 쉽게 예상가지 않는 분야의 권위자이기도 했는데요. 바로 슈바이처는 오르간, 아인슈타인은 바이올린에 있어서 전문 음악가로 불릴 만큼 권위자였다고 합니다. 이름, 노벨상, 클래식 음악까지... 닮은 점이 많은 이들의 음악 세계로 떠나보시죠.

바흐의 권위자 슈바이처

프랭크 탐슨 세계 최고의 바흐 권위자를 알아요?
윌리 월터스 알버트 슈바이처요. 그는 바흐를 공부하면서 평생 가장 큰 전환기를 맞았죠.
프랭크 탐슨 불행히도 그 뛰어난 재능을 버리고 의사가 되어 아프리카 정글에 들어감으로써 역시 천재는 광인에 가깝다는 내 이론을 증명했죠.
윌리 월터스 슈바이처가 미쳤다고요?
프랭크 탐슨 네, 재능을 안 쓰는 것도 일종의 악용이니까요.
윌리 월터스 의사로서의 재능이 더 컸던 것인지도 모르죠.

- 영화 <더 컨덕터> 中 대사 일부 발췌 -

세계 최초로 뉴욕필을 지휘하며 여성 지휘자 안토니아 브리코의 삶을 다룬 영화 <더 컨덕터>의 한 장면의 내용을 소개해드렸는데요.


실제로 1949년 안토니아 브리코는 바흐 음악의 권위자라 생각했던 우상인 슈바이처를 만나기 위해 아프리카 랑바레네를 방문했고요. 그들은 바흐와 음악에 대한 토론을 벌였고,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슈바이처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친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이 잘 통했던 거겠죠?  대체 안토니아 브리코는 왜 슈바이처를 만나러 아프리카까지 갔던 걸까요? 슈바이처는 얼마나 대단했던 바흐 전문가였던 걸까요?


필자는 슈바이처의 연대기를 천천히 살펴보던 중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평생 정기적으로 연주회를 개최했고, 음반도 발매했습니다. 때로는 바흐와 음악에 대한 논문이나 책을 쓰기도 했고요.


이 정도의 경력만으로도 그는 음악가죠. 정말 충분합니다. 그러나 많은 활동 중에서도 그가 음악가로 칭송받는 이유는 바흐에 대한 해석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람은 그가 해석한 바흐에 열광했고요. 일종의 교과서 같은 느낌으로 그의 음악이 전해졌던 겁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오르간 연주를 동경해 왔었습니다. 이러한 동경은 내 피 속에 흐르고 있었습니다.

-알버트 슈바이처-

목사, 오르가니스트, 철학자, 의사까지
다재다능했던 삶

1905년 철학, 신학, 음악을 공부하던 슈바이처는 <음악가이자 시인으로서의 바흐>를 집필했습니다. 같은 해 그는 의사가 되어서 아프리카 밀림에서 봉사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는데요.


5년 후 그는 꿈을 이루었습니다. 의사 국가고시에 합격해 본격적으로 아프리카로 떠날 준비를 시작합니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음악에 대한 열정은 쉬지 않았는데요. <독일과 프랑스의 오르간 제작법>, <바흐> 등의 음악 관련 책을 쓰면서요.


평생 그는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스웨덴, 스위스, 덴마크, 독일, 체코 등에서 오르간 연주회를 열었고요. 런던과 귄스바흐 등에서 음반 작업도 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공식 연주는 1954년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성토마스 교회에서 바흐의 여러 작품을 연주한 일입니다.

내가 음악의 도움으로 아프리카의 원시림에 병원을 세우는 데 필요한 자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 알버트 슈바이처 -

인류에 대한 무한한 사랑으로
아프리카를 치료하다.

결국 슈바이처는 모든 것을 제쳐두고 아프리카로 떠납니다. 원시림에 병원을 세우고 아프리카의 수많은 사람이 살아갈 수 있게 도왔습니다. 내과 의사로 직접 그들을 진료할 때도 있었지만, 더 유능한 의사를 데려오는 일에도 적극적이었고요.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절대 아니죠. 가족과 자신의 삶을 포기한 채 오직 다른 사람의 고통만을 위해 노력했던 삶이었습니다. 이토록 의미 깊던 그의 삶은 1952년 노벨상의 평화 부문 수상자로 선정되며 온 세상에 공개되었고요. 지금까지도 의료 봉사의 꿈을 꾸는 후배들에게 본보기가 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는데요. 뭐 알아두시면 두고두고 쓸모 있을지도 모르는 클래식 음악 에피소드라고 하면 될까요. 그가 아프리카 의료 봉사의 삶을 살기까지 음악이 큰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인데요.


사실 아프리카에 병원을 지으려면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했겠습니까. 재력가에게 후원을 받았다고 해도 쉽지 않았겠죠. 원시림에 병원을 짓고 각종 의약품에 게다가 의료진도 현지에서 생활해야 했으니까요. 이를 위해 그는 부지런히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오르간을 연주하고, 음반을 발매했습니다.


또 저술이나 강연료를 통해 번 돈을 모두 끌어모아서 아프리카로 가져갔다고 에세이 <나의 어린 시절>에 고백한 바 있습니다. 음악의 힘, 정말 대단합니다. 슈바이처의 마음처럼요.

바이올리니스트 아인슈타인

아인슈타인은 참 바쁘게 살았던 학자입니다. 집에서 지내는 일이 거의 없을 정도로 전 세계 곳곳을 다니며 강연과 연구를 이어갔는데요. 이렇게 잦은 출장이나 여행길에 반드시 챙겨가는 품목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바이올린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는데요. 6살부터 아인슈타인에게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다른 악기보다 바이올린에 매력을 느꼈던 그는 13살에 모차르트가 작곡한 대부분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완벽히 연주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익힌 클래식 음악에 대한 사랑 덕분에 평생 바이올린과 음악을 가까이하며 살았고요. 그는 집에 손님들을 초대해서 바이올린 연주를 선보이는 걸 좋아했다고도 해요.


또한 그는 음악 친구 사귀는 일을 열심히 했다고 합니다. 혼자만의 연주가 아닌, 여러 연주자와 함께 연주하는 일도 좋아했거든요. 특히 그는 실내악 연주를 즐겼는데요. 피아니스트로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첼리스트 그레고르 피아티고르스키, 바이올리니스트 브로니슬라프 후베르만 등이 대표적인 그의 연주 절친들입니다.

516, 500불에 낙찰된
아인슈타인의 바이올린

2018년 3월 10일 뉴욕 본햄스 옥션에서 아인슈타인이 연주했던 바이올린이 미화 516,500(한화 약 6억 817만 원)에 낙찰되었습니다. 5번의 경합 끝에 익명의 단체 소유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바이올린은 그저 세계적인 물리학자가 소유했던 장식품 같던 악기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그가 애정을 담아 연주했던 악기라 더욱더 가치가 높게 평가되었죠. 1933년 미국의 바이올린 제작자인 오스카가 아인슈타인을 위해 특별히 제작한 악기인데요. 바디에는 “세상의 가장 훌륭한 과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 교수를 위해 만들었다”는 문구가 새겨있습니다.

아인슈타인에게 음악은 쉬어가는 시간이 아닙니다. 그가 연구하는 모든 학문에 도움을 주는 존재입니다. 그는 바이올린뿐만 아니라 피아노 연주도 꽤 잘합니다. 화음과 선율 맞추는 일을 즐거워하거든요. 그러나 그가 가장 사랑하는 악기는 바이올린입니다.

- 아인슈타인의 두 번째 아내 엘자가 남긴 회고 中 -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로 우뚝 선 슈바이처와 아인슈타인은 여러모로 닮은 점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알버트라 불린 점도 재미있지만, 악기 연주를 좋아했다는 점도 흥미로웠습니다.


슈바이처의 경우 오르간 연주 등을 통해 모든 돈으로 의료 봉사를 실행할 수 있다는 점도 그렇더라고요. 특히 그 둘이 자신과 잘 어울리는 악기를 고른 것 같아요.


슈바이처의 콧수염은 왠지 오르간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이 어울리고 아인슈타인의 개성 넘치는 헤어스타일은 왠지 멋쟁이 바이올리니스트 같은 분위기를 풍기니까요!

참고 서적|<나의 어린 시절>, 알버트 슈바이처, 정원출판사 50p, 6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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