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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 근친결혼으로 키 152cm..파리 밤문화에 매료된 까닭은?

조회수 2020. 2. 10. 16:4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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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랑
언제 어디서나 추함은
또한 아름다운 면을 지니고 있다.

드라마틱한 인생이었지만 ‘물랭 루즈의 작은 거인’이라 불리며 감동적인 작품들을 남긴 화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의 말입니다.

앙리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배경을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그는 프랑스 최고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의 근친결혼 (당시 귀족 가문에서 근친결혼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탓에 심각한 유전적 결함을 갖고 있었던 그는 평생을 1m 52cm의 신장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당당했던 성격을 움츠러들게 한 그의 상처는 이를 외면한 아버지에 의해 더욱 깊어졌습니다. 아버지는 앙리가 군사나 승마 등과 같은 귀족에 어울리는 삶을 살기 원했고, 오히려 예술가의 길을 가려는 아들을 방해했습니다. 

그럼에도 예술에 대한 앙리의 열정은 식지 않았습니다. 그는 보란 듯이 화가로 활동하는 내내 자유로운 영혼으로 지냈습니다. 나아가 겉모습 너머에 있는 자기 존재의 진정한 본질에 주목해주길 바랐죠.


늘 자신이 먼저 스스로의 신체적 한계를 부각시켜 동정과 연민을 차단했고, 한편으로는 반어와 풍자를 무기로 외모를 비하하는 사람들을 방어했습니다. 또 귀족 특유의 우아한 태도가 배었지만 부르주아 계급의 자기 독선을 혐오했으며 귀족 계급의 사회 관습과 규칙을 배척했습니다. 

로트렉의 친구이자 저널리스트인 타데 나타송은 "앙리는 남성보다는 동물을, 동물보다는 여성을 좋아했다. 그는 미칠 정도로 말을 좋아했지만 말을 타지는 못했다"고 회상했습니다. 작품은 '말 타는 사람'

앙리는 늘 연필을 지니고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 마주하는 장소, 상황에 따라 떠오르는 영감을 끊임없이 표현했습니다. 


어린 시절 다리가 부러진 후 오랜 기간 침대에 누워있을 때에도 연필은 충실한 벗이자 지루함을 극복하게 하는 수단이었습니다. 그는 매우 빠른 속도로 대상을 묘사했지만 날카로운 몇 개의 선만으로 표현해내는 감각이 탁월했습니다. 

예술적 감각을 타고난 그에게 몽마르트는 색다른 공간이었습니다. 상류 계급의 공간에서는 느낄 수 없는 매력에 매료된 그는 특히 댄서들이 도발적인 춤을 경쟁적으로 선보이는 물랭 루즈의 단골손님이 됐습니다. 


이곳의 소유주이자 앙리의 가능성을 눈여겨 본 지들러는 포스터 제작을 의뢰했고, 이 포스터는 대중들로부터 엄청난 환호를 받으며 앙리를 스타 작가로 만들었습니다. 아래의 그림은 ‘문제의(!)’ 작품입니다.

앙리는 포스터 상단에 클럽의 이름을 세 번이나 의도적으로 겹쳐 놓았습니다. 그 밑에 적힌 라 굴뤼(본명 루이즈 베버)는 관중들을 향해 다리를 높이 들어 올리고 있는 여성, 스타 댄서입니다. 사람들은 앙리의 아이디어에 열광했고 그의 작품들은 무서운 속도로 유통됐습니다. 


그의 삶은 달라졌습니다. 로트렉의 포스터에 등장하면 누구든 유명해지는 분위기 탓에 너도 나도 그를 찾았죠.

앙리는 직업여성들을 도덕적인 잣대로 판단하지 않고 있는 관찰했고, 인간적 진실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보답으로 그녀들 역시 앙리의 외모에 좌우되지 않았죠. 

실제로 화폭 속 여인들을 희극적 또는 비극적으로 묘사한 것은 그들을 비웃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위선과 가식으로 뭉친 상류사회를 조롱하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싱어송라이터였던 아리스티드 브뤼앙의 포스터 역시 그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그림 속에서 아리스티드는 풍성한 망토를 걸치고 챙 넓은 모자를 쓰고 붉은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있습니다.그를 소재로 한 작품들은 다양하게 변주됐습니다.
1892년부터 1895년까지 앙리는 몽마르트 유곽에서 일주일을 보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여성들의 모습을 관찰했는데요. 그녀들은 뮤즈이자 조언자였고 연인이었습니다.

자유분방한 그녀들의 일상생활은 그의 작품 모델이자 영감이 됐죠. 이런 배경 속에서 로트렉의 '엘르' 석판화 연작이 탄생했습니다. '욕조에 물 채우는 여자'도 그중 하나입니다. '엘르' 연작은 이후 여러 차례 한정판 책으로 묶어 출판되기도 했습니다.

한편 이 시기는 프랑스는 매거진 저널리즘의 황금기였습니다. 파리 미술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앙리는 이 분야에서도 빛을 발했습니다. 특히 풍자 잡지 <르 리르(비웃음)>는 스타들의 밤 문화를 비롯해 유명 인사들의 가십거리, 정치 풍자, 군대 스캔들에 초점을 맞춘 기사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로트렉은 이 잡지에 풍자 그림을 자주 기고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앙리는 술을 비롯한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지 못해 건강이 눈에 띄게 나빠졌습니다. 정신착란과 우울증에 시달리던 그는 신경외과에 입원에 11주를 보냈습니다. 가까스로 퇴원했지만 그는 자신의 행동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언론에 의해 미친 사람 취급을 받게 됐습니다. 

이후 뇌졸중으로 반신불수가 된 그는 서른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어느 유파에도 소속되길 거부하고, 관습에 젖어있던 파리 미술계를 뒤흔든 그의 대담함은 오래도록 회자되고 있습니다. 또 그의 다양한 포스터들은 현대의 시각에 비추어 봤을 때에도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여전히 그가 ‘현대 그래픽 아트의 선구자’로 손꼽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 아닐까요. 

<툴루즈 로트렉展-물랭 루즈의 작은 거인> 

2020.01.14 - 2020.05.03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0:00-19:00 (월요일 휴관)

참고ㅣ<툴루즈 로트렉의 드라마틱한 생애>, 세르히오 가디(큐레이터), 승인배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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