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족'의 가을을 위한 특별전들
코로나19 유행에도 구태여 극장을 찾아 영화를 봐야만 만족하는 이들을 위해, 바로 지금 곳곳의 극장에서 열리고 있는 영화 특별전들을 소개한다.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는 한국에서 개최되는 다큐멘터리 영화제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DMZ라는 타이틀을 내세우고 있긴 하지만 '통일'보다는 '평화'에 걸맞은 큐레이션 아래 동서고금 다양한 다큐멘터리를 선보이고 있다. 경쟁/비경쟁과 더불어, 올해 영화제가 준비한 기획전은 셋이다. 일본감독으로서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소신발언을 해 화제가 됐던 소다 카즈히로 특별전은 사전 조사와 대본을 사용하지 않는 '관찰영화'를 지향하며 가와사키, 오카야마, 우시마도 등 일본의 소도시 속 사람들의 삶을 바라본 작품 다섯이 모였다. 올해로 30주년을 맞이한 노동자뉴스제작단 특별전은 87년 이후 노동단체들의 투쟁을 담은 20여년의 흔적들을 볼 수 있다. 이탈리아 다큐멘터리스트 3인전은 1910년대의 루카 코메리오, 1950년대의 비토리오 데 세타, 알리체 로르바케르와 함께 동시대 최고의 이탈리아 감독으로 손꼽히는 피에트로 마르첼로의 작품들로 구성됐다. 오는 10월 개봉하는 마르첼로의 최신작 <마틴 에덴>(2019)을 만나기 전 그의 영화 세계를 예습하기에 좋은 기회다.
디아스포라 영화제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면서도 제 문화를 지켜온 유대인을 지칭하는 낱말인 '디아스포라'는 오늘날 이주민, 추방, 난민 등을 이야기할 때 주로 언급된다. 인천에서 올해로 8회를 맞는 디아스포라 영화제는 낯선 터전에서 마주한 타인이나 풍경을 경험하는 사람을 담은 작품들을 상영한다. 한국에서 무국적자로서 살아가는 탈북민 2세의 사춘기를 그린 단편 <대리시험>(2019)과 20년 전 헤어진 아버지를 찾아 우주로 떠나는 브래드 피트의 블록버스터 <애드 아스트라>(2019)가 한 영화제에 모일 수 있는 근거다. 17살 소녀의 로드무비를 통해 3.11 동일본 대지진의 상처를 파고든 <바람의 목소리>, 무심코 프랑스 파리에 온 이스라엘 청년 요아브를 따라가며 이스라엘과 프랑스의 갈등을 은유한 2019년 베를린 황금곰상 수상작 <시너님스> 등이 상영된다.
홍상수 특별전
광화문의 단정한 예술극장 씨네큐브는 홍상수의 새 영화 <도망친 여자> 개봉에 맞춰 그의 전작들을 상영하는 특별전을 마련했다. <북촌방향>(2011), <다른나라에서>(2011),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2012), <우리 선희>(2013), <자유의 언덕>(2014),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2015) 등 2011년부터 5년 사이에 발표한 여섯 편의 작품이 상영된다. 정유미, 유준상, 이선균, 문소리 등 홍상수가 편애하던 배우들이 출연했고 이자벨 위페르, 제인 버킨, 카세 료 등 외국 배우들이 크고 작은 역할로 참여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페르소나 김민희와의 협업이 이어지기 전과 후, 홍상수의 영화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곱씹어볼 수 있는 자리라 할 만하다.
키에슬로프스키 특별전
CGV아트하우스는 폴란드의 영원한 거장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특별전을 진행 중이다. '데칼로그, 전과 후'라는 부제를 단 이번 기획은 키에슬로프스키가 폴란드 방송국의 의뢰를 받아 만든 10부작 TV 영화 <데칼로그> 전편, 그중 5부 '사람을 죽이지 마라'와 6부 '간음하지 말라'를 극장용으로 재편집한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과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 프랑스 국기의 색깔을 따 자유, 평등, 우애에 대한 진중한 질문을 던지는 <세 가지 색> 3부작 등 그의 걸작들을 모두 상영한다. 한없이 진지한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를 요즘처럼 영화가 가볍고 편리해진 시대의 한산한 멀티플렉스에서 만나는 건 꽤나 진귀한 경험이 될 것 같다.
가을날의 재회
얼마 전 일본 감독 오바야시 노부히코 회고전을 마친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선 최근 개봉한 유의미한 작품들을 트는 연례 프로그램 '가을날의 재회'를 운영 중에 있다. 올해 극장가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극장을 찾는 발길이 확 줄어들어 예년에 비해 퍽 적은 관객만 만나고 개봉을 마친 영화가 많았기에 '가을날의 재회' 상영이 더 뜻깊어졌다. 브라이언 드 팔마의 <도미노>와 다르덴 형제의 <소년 아메드> 등 노장들의 신작, 셀린 시아마의 <워터 릴리스>와 미야케 쇼의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 등 필모그래피를 쌓을수록 보다 탄탄한 연출력을 보여주는 작가들의 수작을 다시 스크린에서 만나보자. 평일 낮시간대엔 '굿애프터눈 시네마테크'의 일환으로 오즈 야스지로의 걸작 <가을 햇살>(1960)도 상영한다.
‘씨네가든’
묵묵히 메이저 흥행작과 다양성영화를 아우르는 상영 프로그램을 운영 중인 충무로의 대들보 대한극장은 매해 봄과 가을 '씨네가든'을 개최하고 있다. 매주 금요일 토요일 저녁, 적막한 극장을 벗어나 8층 루프탑에서 영화와 맥주/커피를 즐기는 걸 콘셉트로 한 상영회다. SNS를 통해 데이트 코스로 점점 입소문이 퍼지고 있는 씨네가든의 이번 가을 상영작은 '로맨스'에 초점을 맞췄다. <라붐>(1980), <사랑과 영혼>(1990), <제리 맥과이어>(1996), <브리짓 존스의 일기>(2001), <500일의 썸머>(2009) 등 시대를 아우르는 다섯 편의 사랑 영화를 튼다. 그 유명한 <라붐> 속 헤드폰 씌워주는 신, <사랑과 영혼>의 도자기 빚는 신을 가을밤 적당히 차가운 공기와 함께 보는 맛!
‘원데이 시네마’
한국 유일 단관극장인 광주극장은 공간이 주는 아우라부터 대단하다. 824석에 달하는 넓은 공간과 그에 걸맞게 높은 천장은 이젠 나이가 좀 있는 관객들이 생각하는 전통적인 극장의 모습이고 그래서 더 기묘한 인상을 남긴다. 이런 특별한 공간에서 좋은 영화를 본다면 그 만족은 확 불어날 것이다. 올여름부터 진행되고 있는 '원데이 시네마'는 그 쾌감을 최대치로 누리는 프로그램이다. 제목처럼 하루종일 딱 한 편의 영화를 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긴 러닝타임의 명작들을 만나는 자리다. 7월 미겔 고미스의 <천일야화>(2015), 8월 류스케의 <해피 아워>(2015)에 이어, 오는 9월 26일엔 중국 감독 왕빙의 다큐멘터리 <철서구>(2003)를 상영한다. 철거 명령이 내려진 중국 도시 셴양의 노동자들을 6mm 카메라로 담아낸 9시간 37분의 다큐멘터리다. '원데이 시네마'의 대미를 장식하는 10월의 영화는 헝가리 감독 벨라 타르의 <사탄탱고>(1994)다. 문명이 비껴간 마을을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헝가리 대평원의 주민들의 이야기를 엄정하고 카메라워크로 담아낸 걸작을 광주극장에서 마주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