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의 명작들을 탄생시킨 '이 곳'

조회수 2019. 12. 10. 18: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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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위한 문화예술 X GS칼텍스] 반 고흐의 수많은 명작들의 모태가 됐던 프랑스의 소도시 아를
청색의 밤하늘과 진한 노란색 불빛으로 밝혀진 거리

이 그림 많이 보셨죠?
바로 빈센트 반 고흐의 <밤의 카페 테라스>입니다.
고흐의 대표 유화 그림 중 하나로, 프랑스 아를 포룸 광장의 한 카페를 배경으로 하고 있죠.

차가운 느낌과 따뜻한 느낌이 강렬하게 대비되는 게 특징이에요.
이 작품 속 카페가 있는 포룸 광장은 반 고흐에게 아주 특별한 곳인데요.

고흐는 이 카페에 앉아 야외 밤 풍경을 담은 작품 그리기를 즐겼어요.

고흐에게 이 카페와 광장은 안정감과 여유, 그리고 영감을 주는 공간이었죠!
오늘은 GS칼텍스, 그리고 널 위한 문화예술과 함께
고흐가 사랑에 빠진 도시 ‘아를’로 떠나보겠습니다!

1888년 파리, 반 고흐는 고향 네덜란드를 떠나 파리에서 지낸 지 일년 반이 됐습니다.
하지만 고흐는 파리 생활에 질려버리고 말죠.
제각기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사실 고흐는 이 당시, 여러 화가들과 교류하길 원했습니다.
하지만 불 같은 성격으로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헀죠.

또한 경제적 어려움, 예술에 대한 고통으로 인해 고흐는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결국 고흐의 동생 테오는 고흐가 더 이상 파리에서 생활할 수 없다 판단했습니다.

고흐 역시 파리를 떠나기로 결심하죠.
당시 반 고흐는 일본의 민화 ‘우키요에’에 빠져있었는데요.
선명하고 밝은 느낌의 표현들을 담은 ‘우키요에’ 작품에 매료된 반 고흐는 밝은 색을 보려면 따뜻한 지방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했죠.
고흐는 파리에서 기차를 타고 16시간을 달립니다.

그리곤 프랑스 남부의 아주 작은 시골마을에 도착하죠.

‘아를’

1888년 2월 20일 고흐가 도착한 ‘아를’은 흰 눈이 쌓여있어지만, 봄의 태동을 함께 알리고 있었죠.
눈과 돋아나는 새싹 사이 반짝이는 빛,
고흐는 ‘아를’의 매력에 감동했죠.

아를에 도착한 고흐는 정착을 결심합니다.
그리고 한 집을 얻어 ‘노란 색’으로 칠하는데요.

‘노란 집’

고흐는 이 공간에서 아를이 주는 아름다움을 그리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고흐는 아를에서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화가들만의 공동체를 꾸릴 수 있다 믿었던 것이죠.

1888년 6월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 속에 이 내용이 담겨져 있는데요.
아를과 같은 마을에서 화가들이 같이 지낸다면 생활비를 아끼고, 화가들이 서로 친목과 경쟁하며, 콜렉터로부터 독립해 새로운 예술세계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 보입니다.

고흐는 파리에서 만난 화가들을 그곳에 초청했지만, 아무도 고흐의 초대에 응답하지 않았죠.
고흐는 자신의 친구이자 존경해 마지않던 '고갱'을 자신의 노란 집으로 초대하는데요.

고흐는 고갱이 아를에 도착하기까지, 수많은 편지를 남깁니다.

또 고갱을 설득하기 위해, 당시 작품 수집 활동으로 어느정도 부를 축적한 동생 테오에게 부탁해 고갱의 빚을 탕감해주고, 아를에서의 숙식을 제공하기로 하는데요.
고갱은 결국 승낙하게 되죠!

고갱이 아를에 도착하기 전부터 고흐는 서로 작품을 교환하자며 그림을 서신으로 주고받습니다.
이 두 자화상이 바로 서로 주고 받은 그림인데요.

고갱과 고흐 모두 각각 자신을 순례자, 구도자의 모습으로 담고 있습니다.
얼마 안되어 고갱은 아를에 도착하는데요.

고흐는 고갱의 방의 자신의 <해바라기> 작품을 걸며 반겼지만, 고갱은 작은 마을과 꾀죄죄한 노란 집의 모습에 실망하고 맙니다.

이후 불화가 시작됐죠.

성격적 차이는 물론 생활 패턴도 달랐는데요.
무엇보다도 작품에 대한 견해 차가 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하루는 고흐가 자신이 자주 가는 카페의 여주인을 작품에 담습니다.

물론 부끄러움이 많았던 고흐 대신 고갱이 주인에게 모델이 되어달라 부탁했죠.
이후 자신의 노란집으로 카페 주인을 모시고 그림을 그리는데요.

그녀에게 평소 깊은 고마움을 느꼈던 고흐는, 그녀를 화사하고 고풍있게 묘사했죠!
하지만 같은 장소에서 그녀를 그린 고갱의 시선은 달랐습니다.

어수선한 분위기의 한 술집 카페 속에 그녀를 위치시키고, 그녀의 앞에는 값싼 술인 ‘압셍트’를 그려넣었죠.

고갱은 고흐의 주변 인물들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러한 생각을 고스란히 작품 속에 담았습니다.
고흐도 그런 고갱의 마음을 눈치챘지만, 고갱에 대한 존경심과 함께 못 본 척 하죠.

하지만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1888년 12월.
고흐와 고갱은 노란 집에서 서로를 그리는데요. 고갱은 고흐가 해바라기를 그리는 모습을 그렸죠.
하지만 그림 속엔 다 시들어버린 해바라기와 늙고 병든 고흐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죠.

존경하던 화가 고갱이 자신을 마치 술에 취한 주정뱅이로 그려놓은 모습은 고흐에게 모독으로 다가왔습니다.

고흐와 고갱은 더욱 더 자주 부딪히게 됐고, 결국 고갱은 아를을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고갱이 떠나려하자 고흐의 불안 증세는 점점 더 커져갔습니다.

항상 술에 취해있었고, 외로워했죠.
1888년 12월 23일 밤

고갱은 빅토르 위고 광장을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고흐를 발견하는데요. 고흐는 면도칼을 손에 쥐고 있었죠.

고흐는 자신의 모습이 들통이 나자 자리를 황급히 벗어났습니다.
고갱은 다음 날 테오로부터 고흐가 자신의 귓볼을 잘랐다는 소식을 전해듣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고흐는 아를 시립병원 독방에 입원하게 되죠. 이후 생레미의 정신병원으로 떠나면서 아를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합니다.
고흐가 아를에 머무른 기간은 단 2년. 하지만 고흐는 이 시기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치며, 300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습니다.

지금도 아를을 찾아가면 고흐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데요.
고흐가 머물렀던 병원, 고흐가 좋아헀던 아를 강변의 다리,그리고 밤의 카페 테라스에 등장하는 카페가 여전히 남아있죠.

특히나 밤의 카페 테라스는 <카페 반 고흐>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고흐 그림 속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요.
고흐가 사랑한 도시 아를.

여러분의 눈엔 어떻게 비춰지시나요?
삶의 에너지를 더하는 GS칼텍스 2020캘린더 속에서 고흐가 사랑에 빠진 '아를', '밤의 카페 테라스'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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