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갱은 왜 '타히티'로 떠났을까?

조회수 2019. 12. 14. 21: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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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이 남태평양에 위치한 타히티 섬으로 떠난 이유 [널 위한 문화예술 X GS칼텍스]

원시적인 색감

그리고 자연 속을 거니는 사람들.


반 고흐의 친구이자,

영원한 라이벌


'폴 고갱'


사실 고갱은 살아 생전에 크게 주목받는 화가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전생애 동안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풍을 실험하며, 현대에는 인상주의를 넘어서 강렬한 색과 원근법을 무시한 새로운 구성 가능성을 선보인 화가로 평가받는데요.
고갱의 작품에는 특히나 유럽보다도, 숲과 밀림 같은 자연이 자주 등장합니다.

실제로 고갱은 프랑스 출생이지만, 많은 작품들을 타지에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특히나 많은 작품들을 남태평양의 큰 섬 ‘타히티’에서 만들었는데요.
폴 고갱은 왜 타히티로 떠났을까요?

삶의 ‘에너지’를 더하는 GS칼텍스와 함께, 널 위한 문화예술의 ‘예술가의 이유’ 시작합니다!

고갱은 페루 출신 프랑스계 어머니와 급진적 공화주의자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1851년 프랑스
왕권을 쥔 나폴레옹 3세가 집권하자, 정치적인 문제로 인해 탄압받을 위기에 처한 고갱의 가족은 페루로 망명하는데요.
페루행 배 안에서 안타깝게도 심장마비로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말죠.

때문에 고갱은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누나와 어머니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냅니다.

후에 초등학교에 다닐 나이가 되자 프랑스 오를레앙으로 돌아오는데요.
어렸을 적 본 페루의 모습은 고갱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죠. 마치 잉카 문명을 두고 온 고향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고갱은 사실 20대 후반의 비교적 늦은 나이로 예술을 시작했습니다. 그 전에는 다양한 직업을 가졌는데요.
배에서 선원으로 일하기도 하고, 또 증권거래소에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증권거래소에서 일하던 시절엔 결혼도 하고, 자식도 갖고,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생활을 하기도 했는데요.

고갱은 주변 사람들의 영향으로 갤러리를 드나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그림들을 사들이기 시작하는데요.

대부분 '인상파' 작품들이었죠.
27살이 되던 무렵엔 아마추어 화가들이 모인 모임에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살롱에 작품을 출품하는 등, 예술 활동을 시작하죠.
고갱은 초기 풍경화들을 많이 그리는데요.
인상주의 화풍의 정석을 보여주며 많은 화가들의 지지를 받았죠.

그러면서 카미유 피사로를 비롯한 화가들과 친목을 다지기도 합니다.
그러던 1882년, 고갱의 삶을 뒤바꾸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프랑스의 주식시장이 붕괴한 것이죠.
이 시기 피사로의 조언으로 고갱은 화가의 길을 고민하게 되고, 세잔 등 당대 인상파 주류 화가들과 만나며 화가가 되기를 결심합니다.
화가가 된 이후로 고갱은 생활비 문제로 인해 생활비가 저렴한 곳을 찾아 여러 도시로 떠납니다.
그러던 중 그림에 전념하기 위해 혼자 파리로 돌아온 후로는 벽보를 붙이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충당했죠.

가난한 도시생활에 지친 고갱은 1886년, 프랑스의 퐁타방으로 이사하는데요.

이때부터 인상파를 벗어난 독창적인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화려한 삶이나 모습이 아닌, “원시적인 무언가”
상징적이면서도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의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었죠.

이때부터 고갱은 과감하고 단일한 색의 배경, 보색 대비등을 이용해 강렬한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이후 고갱은 원시적인 것에 대한 선망으로 도시를 떠나
원시적인 세계를 찾아 떠납니다.

처음 그가 찾아간 곳은 '파나마'.

파나마의 삶은 쉽지 않았지만, 자유로운 지역의 주민들을 그리며 고갱만의 스타일을 찾아갑니다.

파나마에서 그린 그의 작품들을 보면, 더 굵고 강렬한 선과 색들을 볼 수 있죠.
하지만 원시에 가까웠던 파나마의 생활은 고갱은 파리로 돌아오게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작품을 사길 원하는 한 콜렉터를 만나게 되는데요.

그의 이름은 ‘테오’
바로 반 고흐의 동생이었죠.

이러한 인연으로 고갱은 반 고흐 형제와 긴밀한 관계가 됩니다.
특히나 반 고흐는 고갱의 화풍에 매료돼 자주 고갱을 ‘최고의 화가’라 불렀죠.

이 시기, 반 고흐는 네덜란드를 떠나 도착한 파리 생활에 지쳐 새로운 지역으로 떠나는데요.

기차를 타고 달리던 1888년 2월.
프랑스 남부의 작은 시골 마을 아를에 도착합니다.
흰 눈이 소복히 쌓인 사이로 봄이 찾아오는 마을.

반 고흐는 아를에 빠져들게 되고, 바로 집을 얻어 생활하기 시작합니다.

반 고흐는 이 아를에서 화가들만의 공동체가 만들어지길 꿈꿨는데요.

1888년 6월 반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보내 평소 존경해 마지않던 고갱을 꼭 이곳으로 모셔오자고 말합니다.
고흐는 테오를 설득해 가난한 고갱의 빚을 모두 탕감해주고
아를에서의 숙식도 제공하기로 합니다.

고갱도 이를 수락하는데요.
반 고흐는 고갱이 아를에 오는 것에 매우 들떠있었죠.

하지만 고갱은 아를에 도착하자마자 크게 실망합니다.
고갱은 친구에게 아를을 ‘무척 작고 꾀죄죄한 곳’이라 말했죠.
두 사람은 아를에 같이 살면서 함께 지냈지만, 친구이자 라이벌이기도 했습니다.

고흐는 열정적이었고
고갱은 냉소적이었죠.

둘의 성격차이는 결국 불화로 이어지게 됩니다.
고흐는 애써 고갱의 불만들을 무시하려 했지만, 고갱은 작품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불만을 담았죠.

1888년 12월 고흐와 고갱은 아를의 집에서 서로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는데요.
고갱은 해바라기를 그리는 고흐의 모습을 담았습니다.
우정을 기념하기 위해 그린 작품.

하지만 다 시들어버린 해바리기에 고흐의 모습은 늙고 초라해 보였죠.
고흐는 이 작품을 보고 매우 화가 났습니다.
‘내 모습이 어쩐지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말했죠.

작품 활동에 매진한 자신을 마치 술 취한 듯 묘사한 그림에 고흐는 분노했습니다.

서로 생각이 달랐던 고흐와 고갱은 더 이상 만나지 않기로 하고, 고갱은 아를을 떠납니다.
이후 고갱은 파리, 브르타뉴 등 프랑스 각지를 돌아다니는데요.

그곳에서 더욱 원시적이고 상징적인 느낌의 작품들을 선보이죠.

이후 원시성에 대해 몰두하게 된 고갱은 더 먼 나라로 떠나길 결심합니다. 그리고는 남태평양 타히티로 떠나죠.
‘타히티의 관습과 풍경을 연구하고 그리기 위한 목적’으로
프랑스 교육부와 미술부처의 서신을 가지고 많은 이의 주목 속에 고국을 떠났는데요.

그리고는 타히티의 수도, '파테이테 섬;에 도착합니다.

하지만 파테이테 섬은 이미 프랑스의 식민지로 이미 유럽과 비슷한 분위기로 변해있었죠.

고갱의 생각과는 달리 문명의 때가 묻어 있어 적잖은 실망감을 안겨주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계속해서 작품을 남겼는데요.

작품 속엔 복잡한 도시를 떠나 여유로운 공간의 모습이 담겨있죠.
또 반대로 서구문명의 시선도 엿볼 수 있는데요.

고갱의 작품 속엔 당시 서구사회가 생각하던 원시에 대한 동경과 더불어, 지배하고자 하는 욕구를 엿볼 수 있습니다.

한 차례 탐방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온 그는 그림을 팔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여러 사건들을 겪으며 결국 성과를 얻지 못하죠.
고갱은 이후 다시 타히티로 떠납니다.
더 원시적인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고 싶어했죠.

고갱은 자본으로부터 멀어진 원주민의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그리곤 타히티 섬의 마르케사스에 있는, 유럽인은 셋밖에 살지 않는 '도미니크'에 도착하는데요.

하지만 다시 돌아온 타히티에서 그는 점정 병들어 갔습니다.
가난과 고독에서 벗어나지 못한 고갱은 죽기전에 유작을 남겨야겠단 결심을 하는데요.

1898년 그의 대작이 세상에 나타나죠.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

작품 속엔 고갱의 원시성에 대한 고민과 함께 자신의 삶에 대한 회고들이 담겨 있죠.
1903년 고갱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납니다.

고갱은 자유를 갈망하는 보헤미안이자, 어디에도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화가였죠.

고갱은 미술사의 변방에서 자신의 입지와 싸웠고, 원시 세계에 대한 동경과 궁금증으로, 서슴없이 떠났습니다.
그 속에서 자신이 발견한 삶과 존재의 근원을 화폭에 담으며, 새로운 예술적 가능성을 선보였는데요.

지금도 타히티에선 고갱이 바라본 '원시세계'와 함께 다양한 작품 속 풍경들을 만나볼 수 있죠.
삶의 ‘에너지’를 더하는 GS칼텍스와 2020 캘린더 속에서 고갱이 마주했던 원시의 세계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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