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분노한 누드화

조회수 2020. 6. 26. 08: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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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뒤바꾼 '벌거벗은 여인'
침대 위에 비스듬히 누워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여성.
그는 미술 역사상 가장 큰 스캔들을 일으킨 여성이 되었습니다.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
19세기 파리에서 이 작품이 전시되었을 때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작품 앞에 모여들었는데요.
온갖 험한 말과 날카로운 탄성이 그림을 찔렀고 심지어 그림을 훼손하려는 사람도 있었죠.
때문에 그림은 살롱의 가장 외진 곳으로 옮겨지기도 했습니다.

이 그림의 어떤 점이 사람들을 그토록 화나게 했던 걸까요?
마네가 살았던 19세기 중반의 프랑스.

당시 프랑스는 왕정에서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정치적 격동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전쟁과 혁명이 잇따라 일어났고 이런 분위기는 회화에 분명한 영향을 미쳤죠.
영국 록밴드 ‘콜드 플레이’의 앨범 커버로도 유명한 이 그림.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인데요.
1830년 7월 혁명으로 부르봉 왕가가 무너지자 들라크루아는 이 작품을 그림으로써 그것을 기념했습니다.
누군가가 ‘천사를 그려달라’고 요청하자 '천사를 눈앞에 데려오라. 그러면 그려주겠다'라고 대답했던 쿠르베.
그는 종교나 역사 속 영웅을 그리기보다는 평범한 풍경을 소재로 한 사실주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것이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믿었죠.
하지만 마네의 〈올랭피아〉는 이러한 변화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있었습니다.
혁명을 그리거나, 혁명을 일으키는 건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죠.
마네는 프랑스의 상류 부르주아 가문에서 태어났고 때문에 주류 사회의 일원이 되려는 의지가 강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마네의 다른 작품에서도 살펴볼 수 있는데요.
1862년 마네가 세상에 공개했던 이 그림, 〈튈르리 정원의 음악회〉입니다.

이 그림은 마네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가운데 베일로 얼굴을 가린 여성은 마네의 부인 쉬잔 렌호프입니다.
왼쪽으로는 훤칠한 키의 마네가 서 있죠.
그는 옷차림에 많은 신경을 쏟았던 멋쟁이 신사였습니다.
그는 튈르리 정원의 음악회에 참석해 공원 어딘가에 있었을 오케스트라 연주를 듣는 중입니다.
하나같이 말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이들과 함께 말이죠.
따라서 마네처럼 인정욕구가 강했던 시람이 사람들을 자극하려고 〈올랭피아〉를 그렸던 건 아닐 겁니다.
〈올랭피아〉가 조롱거리로 전락했을 때 마네는 진심으로 낙담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왜 그토록 화가 났던 걸까요?
당시 〈올랭피아〉에 대한 공격은 대부분 ‘성’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흑인 하녀가 백인 여성에게 꽃다발을 건네고 있는데요.
이게 너무나 뻔한 내용을 상징한다는 겁니다.

‘올랭피아’라는 이름 자체도 19세기 파리의 성판매 여성들이 즐겨 사용하는 이름이었죠.
하지만 사람들이 문제삼은 건 누드가 아니었습니다.

누드화라면 르네상스 시대부터 수없이 그려져왔고 당대에도 수많은 누드화가 제작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올랭피아〉 자체도 티치아노의 이 그림.
〈우르비노의 비너스〉로부터 모티브를 빌린 것이었습니다.

두 그림을 나란히 비교해 보면 〈올랭피아〉가 〈우르비노의 비너스〉의 많은 것을 그대로 가져왔다는 걸 알 수 있죠.
침대 위에 비스듬하게 누운 여성과 검게 칠해진 왼쪽 배경.
오른쪽에는 하녀가 있구요.
손의 위치나 팔찌 같은 장신구, 침대 시트가 베개 밑으로 딸려 들어간 것까지 똑같습니다.

하지만 〈우르비노의 비너스〉에는 찬사를 보냈던 사람들이
왜 〈올랭피아〉 앞에서는 유독 분통을 터뜨렸던 걸까요?
당시 사람들이 지적했던 〈올랭피아〉의 가장 큰 문제는요.
이 그림이 ‘현실 속의 누군가’를 생각나게 한다는 거였습니다.

이 그림이나 저 그림이나 결국 누드화지만 〈비너스의 탄생〉이나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모두 신화라는 가면을 쓰고 있었죠.
결국 누군가의 벗은 몸을 감상하려는 욕망이라는 건 변함이 없지만요.
‘난 누군가의 누드를 보는 게 아니라 신화 속 인물을 보는 거야'라며 자신의 관음증적 욕망을 합리화할 수 있었죠.
하지만 마네는 〈올랭피아〉를 그리면서 모델을 이상화하거나 미화하지 않았습니다.
〈튈르리 정원의 음악회〉를 그릴 때처럼 파리의 길거리에서 마주칠 법한 사람을 그렸던 겁니다.
때문에 신화 속 여신의 누드에는 박수를 쳤던 사람도 실제 있을 법한 여성의 누드를 그린 작품에는 거센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올랭피아’라는 이름이 문제가 되었고 흑인 하녀가 들고 있는 꽃다발도 문제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발치의 고양이마저 문제 삼았죠.
프랑스어로 암고양이는 여성의 성기를 은유하는데요.
때문에 굳이 개를 고양이로 바꿔 그린 건 마네의 불순한 의도를 상징한다는 겁니다.
19세기에 〈올랭피아〉가 이처럼 스캔들을 일으켰던 것은 ‘현실 속 인물의 누드를 그리지 않는다’는 금기를 깼기 때문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요.

오늘날 〈올랭피아〉는 당대의 평가보다 훨씬 더 반역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는 겁니다.
이 작품은 르네상스 이후 약 400년간 이어졌던 서양미술의 흐름을 바꾼 ‘분기점’으로 여겨지고 있죠.

어떤 점이 그런 걸까요?
〈올랭피아〉 이전의 화가들에게 가장 중요했던 과제는 ‘어떻게 실제처럼 보이게 할 것인가'였습니다.

세상에는 어떤 이상화된 본질이 있고 현실은 이상화된 본질의 복제이며 그림은 그 현실의 복제라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예술가에게 가장 중요한 목표는 3차원인 세계를 2차원의 그림으로 재현하는 것이었고 가능하다면 더 이상화해 본질에 닿으려 했죠.
이를 위해 원근법이나 명암법 같은 다양한 장치들이 개발되고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마네의 그림에서는 깊이감을 주는 장치나 대상을 이상화하는 장치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티치아노의 그림에선 바닥이 체크무늬로 되어 있어 작품에 원근감을 주는 장치로 활용되고 있죠.
하지만 마네의 그림에서는 그런 장치들이 발견되지 않습니다.
티치아노의 그림에선 비너스의 팔꿈치나 다리 밑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지만 마네의 그림에서는 오직 뚜렷한 윤곽선과 평평한 색면만이 보입니다.
2차원의 화폭에 3차원을 재현하려고 했던 오랜 전통을 전복하고 오히려 2차원의 평면성을 드러낸 겁니다.
어쩌면 이건 당시 파리에서 유행하고 있었던 일본 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19세기 중반은 유럽과 일본 사이에 통상조약이 체결되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면서 일본의 판화인 우키요에가 유럽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죠.
원근법이나 명암법을 사용하지 않고 오직 정확한 데생만으로 대상을 표현하는 우키요에.

이전에 접하지 못했던 우키요에의 기법은 파리의 젊은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표현 가능성에 대한 영감을 심어주었습니다.
마네도 그중 하나였죠.
그리고 마네 이후 서양 미술은 〈올랭피아〉에서 암시되었던 방향, 입체감 대신 평면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인상주의, 입체주의, 미래주의…

한 번쯤 들어봤던 현대의 예술 사조들이 모두 〈올랭피아〉의 자식들인 겁니다.
마네는 언제나 주류 사회의 일원이 되고 싶어했지만 그런 그가 의도치 않게 반역적인 그림을 그렸고 나아가 혁명가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흥미롭습니다.
서양 미술 역사상 가장 큰 스캔들의 주인공이었던 〈올랭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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