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는 왜 수련을 그렸을까?

조회수 2020. 7. 17. 11:2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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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가 수련을 그린 이유
형태가 모호한 선과 시시각각 변하는 인상.
인상파의 창시자 클로드 모네.
모네는 자신의 화풍 속에 수많은 풍경화를 남기며 새로운 회화의 시대를 열었다 평가받는데요.
실제로 모네의 작품들은 편안하고 평화로운 느낌과 동시에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보는 이들의 감정을 건드리곤 합니다.
수많은 풍경화를 그린 모네의 작품 속에서도 특히나 유명한 작품이 있는데요.

바로 수련이죠.

모네는 수련을 정말 많이 그렸습니다.
1893년부터 죽기 직전까지 약 30년간의 세월동안 모네가 남긴 수련 작품은 무려 250여편에 달하죠.
특히나 이 수련 작품들은 모네 특유의 분위기를 너무나 잘 담아내며 모네 작품의 정수로 평가받기도 하는데요.

그렇다면 모네는 왜 수련을 그렸을까요?
모네의 작품 속 연못과 수련은 모네가 살았던 집 정원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모네는 19세기 후반부터 프랑스 파리 근교의 지베르니에 집을 짓고 생활했는데요.
자신의 집 정원을 꾸미는 데 정성을 쏟았죠.
모네는 매일 정원사에게 정확한 설계와 식물들의 배치를 요구했습니다.
지금도 프랑스를 찾아가면 이 모네의 집과 정원 그리고 연못을 만나볼 수 있죠.
보통 이 작품을 작은 캔버스에 담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아주 거대한 캔버스에 그려졌습니다.
프랑스 오랑주리 미술관에서는 여러 판넬로 구성된 수련 작품을 만나볼 수 있죠.
모네의 수련은 매번 새로운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비슷한 구도와 장소에서 여러 번 그린 것입니다.
덕분에 같은 대상에 대해서도 매번 다른 느낌을 전달하는데요.
실제로 수련 연작 초기에는 선명했던 형태들이 갈수록 모호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특징은 수련 연작 뿐만 아니라 모네의 풍경회화 대부분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모네는 보통 프랑스 지방의 풍경들을 화폭에 담았는데요.
한 장면을 한 번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같은 장면을 다른 시간, 다른 인상으로 여러 번 그렸죠.
때문에 모네 작품 속에서는 같은 구도 임에도 시간과 계절이 지남에 따라 색과 인상이 변하는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풍경화로 유명한 모네이지만 모네는 어렸을 적부터 ‘캐리커쳐’를 그렸습니다.
학교 공부가 별로 흥미가 없었던 모네는 짬이 날 때마다 주변사람들의 캐리커쳐를 그렸는데요.
어렸을 때부터 드로잉 솜씨가 남달랐던 그의 캐리커쳐는 동네에서 입소문이 났고 실제로 모네도 생계를 이어나갈 만큼 수입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모네는 약 800여점의 캐리커처를 제작하였고 일부는 지금까지 남아있죠.
그의 아버지는 모네가 가업을 잇길 바랐지만 모네는 예술가를 꿈꿨습니다.
가수였던 어머니는 모네의 예술에 대한 열망을 지지했죠.
동네에서 유명해진 그는 한 미술재료상의 진열장에 자신의 캐리커쳐를 전시했습니다.

이 때 같은 진열장에 놓인 풍경화를 보게 되죠.
하지만 모네는 너무 지나치게 사실적이고 웅장한 그 풍경화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외젠 부댕’이라는 화가의 작품이었죠.
모네는 부댕의 작품이 자신의 그림 옆에 있는 것도 못마땅해 했습니다.
훗날 자서전에선 ‘부댕을 알기도 전부터 그를 증오했다’고 말하기도 했죠.
하지만 부댕은 반대였습니다.
모네의 캐리커쳐를 보고 짧은 순간에 사람들의 특징을 기가 막히게 묘사하는 재능에 감탄하게 되죠.

부댕은 모네를 만나고 싶어 몇번이나 만남을 요청했지만 모네는 계속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끈질긴 요청 끝은 부댕은 모네를 만날 수 있게 되는데요.
부당은 모네에게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외광회화’를 추천했죠.
19세 당시에는 바깥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흔하지 않았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기술이 발전하지 않아서 바깥에서 그림을 그리기엔 많은 장비를 대동해야 했죠.
또 당시에는 사실적이고 디테일한 회화가 각광받던 만큼 작품을 만드는 데 시간이 많이 필요했습니다.
때문에 시시각각 풍경이 변하는 바깥에서 모든 그림을 그리는 것은 어려웠죠.

대체로 작가들은 바깥 장면을 빠르게 스케치한 후 화실에서 작업하거나 머릿속으로 그려 작품을 완성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19세기 중반부터 튜브 물감이 발명되고 상용화되면서 야외에서도 간편하게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는데요.

더불어 빠르게 대상의 특징을 캐치할 수 있는 모네의 능력을 보고 풍경화가 부댕은 바깥에서 그리는 것을 추천한 것이죠.
모네도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처음으로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이를 통해 모네는 자연의 빛을 인식하게 되고 빠져들죠.
이후 모네는 자연 풍경을 그리기로 결심합니다.
모네는 이후 루브르 박물관에 작품 감상을 하기 위해 파리 여행을 떠나는데요.
그는 파리의 화가들이 옛 거장들의 기술을 모방하는 것을 목격합니다.

그는 그런 모습과 달리 자신의 도구들을 바깥으로 들고 나와 자신만의 화풍을 그리기 시작했죠.
모네는 몇 년동안 파리에 머무르며 풍경화 작업에 매진합니다.
이 시기 파리를 찾은 예술가들과 교류하게 되는데요.
에두아르 마네를 비롯한 젊은 신진 화가들과 친해지게 되죠.
1861년 프랑스에선 알제리와의 전쟁이 발발합니다.
때문에 모네도 병에 징집돼 알제리로 떠나죠.
알제리에 있는 동안 모네가 몇가지 작품들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으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후에 인터뷰에서 모네는 알제리의 이국적인 느낌이 자신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줬다고 말합니다.
북아프리카 특유의 가볍고 선명한 색감에 매료됐다고 말하죠.

그는 입대 1년 정도 후에, 장티푸스에 걸려 전역하게 됩니다.
전역 후 모네는 전통 예술에 환멸을 느껴, 전통 미술아카데미 대신 한 화실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르누아르를 비롯한 젊은 작가들을 만나게 되죠.

그들은 함께 예술의 새로운 접근법을 고민했고 새로운 기법들을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 시기, 아들이 전통 회화를 그릴 것을 바랐던 모네의 아버지는 재정적인 지원을 끊게 됩니다.
이는 모네를 가난으로 몰고 가는데요.
생활고와 진로에 대한 고민 속에 한 때 모네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결심할 정도로 우울한 상태에 빠지죠.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만의 화풍을 고수해 나갔습니다.
1865년 1월, 모네는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이는 2년 전 에두아르 마네가 그린 동명의 작품을 오마주 한 것이죠.

2년 전에 그려진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큰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19세기 당시 프랑스 파리의 살롱전은 주류 미술을 대표하는 가장 영예로운 전시였는데요.
마네 역시 당시 주류미술에서 유행하는 누드화를 냈지만 보기 좋게 낙선합니다.
음란하다는 것이 문제였죠.
하지만 당시 카바넬의 누드화 ‘비너스의 탄생’은 당당히 입선했습니다.
같은 누드화인데 둘 중 하나는 숭고하단 찬사를 받고, 다른 하나는 외설스럽다는 비난을 받은 것이죠.

카바넬의 누드화는 신화 속 여성이 신성한 느낌을 풍기는 색채와 함께 부끄러워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네의 작품은 음침한 색채에 남자들과 함께 있는 벌거벗은 여성이 그려져 있죠.
더불어 벌거벗은 여인이 정면을 응시하는 모습은 관객들을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마네의 작품은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지만 당시 새로운 예술 움직임을 꿈꾸는 화가들에겐 큰 영감이 되었습니다.

모네도 그 중 한명이었죠.
모네는 같은 주제를 갖고 마네가 거부당한 살롱전에 출품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작품이 너무 커서 제때 완성할 수 없었죠.
대신 ‘드레스를 입은 여인’의 그림을 제출하는데요.
위 작품과 이 작품 모두에 등장하는 여성, 카밀은 모네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1860년대 후반부터 모네를 비롯한 신진작가들은 보수적인 주류 미술 협회의 전시로부터 출품을 거절당합니다.
결국 73년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등의 예술가는 새로운 조직을 만들죠.
화가, 조각가, 그리고 조각가들의 익명 협회.

그들은 1874년 4월 첫 전시를 여는데요.
모네는 이 전시에서 5점의 작품을 출품합니다.
이 중에는 1872년 아침에 그린 <해돋이>도 있었죠.
전시회 목록 담당자는 작품의 제목이 너무 평범하다며 모네에게 다시 써줄 것을 요구했는데요.
이에 그는 ‘인상’이라는 말을 붙여 ‘인상, 해돋이Impression-Sunrise’ 라고 바꿔 다시 제출하죠.
당시 같이 열린 프랑스의 가장 권위 있는 미술전시회는 매일 1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입장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모네와 친구들의 전시는 첫날 175명, 마지막 날 54명만이 방문했죠.
게다가 대부분은 전시작품들을 비웃었고 ‘이들은 붓질조차 서투른 아마추어’라며 비난했습니다.

특히 예술비평가 루이 르루아는 모네의 <인상, 해돋이>가 ‘벽지문양의 밑그림만도 못한 막연한 인상에 불과하다’며 조롱했습니다.
모네를 비롯한 화가들은 이 조롱을 뒤집어 자신들을 ‘인상주의자’라고 부르기 시작했죠.

그것이 오늘날 가장 사랑받는 사조 중 하나인 인상주의의 탄생이었습니다.
1876년, 모네의 아내 카밀은 결핵으로 병이 났습니다.

모네의 가족은 파리 외곽의 작은 마을 베테우일로 이사하여
부유한 백화점 소유주이자 예술의 후원자인 어니스트 호세데의 가족과 함께 살았는데요.

그녀는 32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죠.
모네는 죽은 아내를 보며 유화를 그리는데요.
훗날 모네는 그의 친구 조르주 클레망소에게 사랑하는 아내의 죽은 얼굴을 보고 색을 떠올리는 것이 삶의 기쁨과 괴로움 둘 다였다고 고백했죠.
미술평론가 존 버거는 이 작품을 죽음을 표현한 그간의 모든 작품 중 가장 강렬하고 주관적이라 평했습니다.
카밀의 죽음 이후 고통의 시간이 지나자 모네는 자신의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19세기 최고의 그림들이라 평가받는 작품들을 만들기 시작하죠.
1880년대 초부터 모네는 프랑스 시골 지역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풍경과 바다 경관을 그린 연작들을 남기죠.
빛의 변화와 계절의 흐름을 포착하기 위해 같은 장면을 여러 번 기록하며 일련의 그림으로 진화하기 시작했습니다.
1883년에는 모네는 프랑스 근교 지베르니에 있는 집과 정원을 빌리는데요.
점차 작품 활동을 통해 재산이 늘어나면서 정원을 늘리고 가꾸게 되죠.
자신의 집에 연못을 들인 것도 이 시기입니다.
자연의 빛에 따라 시시각각 색이 변하는 연못은 모네에겐 더할 나위 없는 영감이 되었습니다.
특히나 물 표면에서 아슬아슬하게 떠있는 수련은 물에 떠있는 것인지 가라앉는 것인지 불분명한, 형태의 인상을 만들었습니다.

때문에 모네는 매일 정원으로 나가 수련을 그리기 시작했죠.
때로는 형태가, 또 때로는 색이 변하는 수련의 모습 속에서
모네는 매순간 새로운 인상을 마주했습니다.

초기엔 선명하던 형태도 날이 갈수록 인상을 위주로 나아갔습니다
거대하게 그려진 수련 작품은 가까이서 보면 형태를 알 수 없는 추상적인 모습을 띄는데요.
작품 전체를 마주했을 때야 비로소 수련임을 깨달을 수 있죠.

많은 관객과 평론가들은 모네의 수련 연작이 추상회화의 출발점이 됐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20세기에 접어들어 모네에게 시련이 닥칩니다.
그의 눈에 백내장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죠.

백내장은 그의 시력에 영향을 주기 시작합니다.
점점 시야가 뿌옇게 변했고 때문에 제대로 색을 감별하기 어려워졌죠.
백내장이 시작되었을 때 그의 그림들은 이전보다 붉은 느낌을 띕니다.

실제로 백내장 환자들의 시야에선 다른 색보다 강한 빨간 색이 더 쉽게 들어오기 때문이죠.
화가로서 치명적인 위기에 봉착했음에도 모네는 작품활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1923년 모네는 2번의 백내장 수술을 받습니다.

수술 이후 어느정도 시력이 회복 됐지만 여전히 색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선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수술 후에 모네는 이전보다 훨씬 푸른 느낌의 수련들을 그렸죠.

1926년 모네는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모네의 장례식에는 50명의 친척, 친구들이 함께 했죠.
그의 오랜 친구 조르주 클레망소는 관 위에 드리워진 검은 천을 치우며 ‘모네에게 검은 색은 없다’ 외쳤습니다.

그리고 색으로 가득찬 꽃무늬 천으로 관을 덮었죠.
인상파의 창시자 클로드 모네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순간적인 인상을 담는다는 모네의 철학은 인상주의라는 시대를 바꾼 사조를 탄생시켰습니다.
그 결과 20세기 이후 수많은 회화적 도전이 탄생했고 또 예술은 진화했죠.
여전히 사람들은 모네의 도전을 기억하며 작품 속에서 저마다의 감상을 느끼곤 합니다.

10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클로드 모네의 작품들.
이 작품들 속에서 여러분은 어떤 게 느껴지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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