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명화 속 사람들은 정말 승리했을까..?

조회수 2021. 2. 8. 22:4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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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한 손에는 삼색기를, 

한 손에는 총검을 들고

사람들을 이끄는 여자


사람들은 모두 여자에게 홀린 것처럼

그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여자를 선두로 전진하는 

이들의 발밑에는 전투의 잔해와 

시체가 뒤엉켜있죠


이 그림은 1830년 7월에 일어난

프랑스 시민혁명을 그리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가 그린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이라는 작품이죠


가로 3.3 미터에 

세로 2.6 미터에 달하는

이 거대한 그림은

현재 파리의 심장인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있습니다


하지만 이 그림은

프랑스를 상징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요


프랑스에서 만든

상품의 포장지나 우표

심지어는 프랑스의 

화폐에서도 발견할 수 있죠


영국의 락밴드

 ‘콜드플레이’의 앨범 표지에도

이 그림이 등장하는데요


앨범의 타이틀곡인

 ‘Viva La Vida’(비바 라 비다)가

프랑스 혁명으로 처형을 앞둔

루이 16세의 이야기이기 때문이죠


이제 백성들의 노래가 들리네

“폭군이 죽었으니 새 왕께 만세!”

Viva La Vida 가사 中


수차례의 시민혁명을 통해

세상을 바꿔왔던 프랑스인들에게

이 그림은 그들의 정체성과 다름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프랑스 혁명을 

그린 수많은 그림 중에서도

유독 이 그림이 프랑스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것일까요?


프랑스의 역사를 설명하려고 할 때,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이는 그림 곳곳에 숨은 상징을 따라가다 보면

그 이유가 명확해지는데요


그림의 한 가운데서

여자가 높이 들고 있는 

이 깃발은 지금의 프랑스의 

국기이기도 한 삼색기입니다


삼색기의 색깔은 

각각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이런 의미로 쓰이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죠


혁명 당시에는 그 의미가 달랐습니다




당시 왕의 가문을 상징했던 흰색과

그를 둘러싼 빨강, 파란색은

파리를 상징하는 깃발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는 왕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동등한 위치에 서겠다는

파리 시민들의 포부를 드러내죠


처음 삼색기가 등장한 것은

이 그림의 배경보다 더 먼저 발생한

1789년 시민혁명 때였습니다



이 혁명의 결과로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처형되죠


그리고 나폴레옹이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하지만 이를 인정할 수 

없었던 주변국들이

끊임없이 싸움을 걸어왔는데요


나폴레옹은 결국 

권력을 잡은지 15년 만에

스스로 왕좌에서 내려오게 되죠


주변국의 왕족들은 비어있는 

왕좌를 루이 16세의 가문인 

부르봉가에 다시 돌려줍니다


결국 혁명 이전으로 돌아간 셈인데요


한 번 왕을 끌어내리고 

자유를 맛봤던 프랑스 국민들이

이를 가만 둘리 없었죠


부르봉 가문이 다시 

집권하게 된 1815년부터

파리에서는 봉기가 끊이지 않게 됩니다



삼색기는 그때마다
시민군의 목표를 가장 압축적으로
나타낸 상징물로 활용되었죠

들라크루아는 이를 반영해
자신의 그림 속에서도
세 번이나 등장시키는데요

첫 번째 삼색기는 찾기 아주 쉽습니다


저 멀리 안개 속 

노트르담 성당 꼭대기에

두 번째 삼색기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화가는

무릎 꿇고 있는 이 시민의 옷에

삼색기의 색들을 숨겨놓았죠


그림 속 사람들의 의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상징은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그림의 가장 왼쪽에 있는 이 남자는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데요


공장에서 일을 하다 거리로 뛰쳐나온

노동자 계급을 상징합니다


정장에 고급스러운 모자까지 쓴 이 남자는

부르주아 계급을 그린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서민 출신이지만

전문적인 직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이들인데요 

귀족과 비슷한 재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엄청난 세금을 부담해야 했습니다


이에 불만을 품고 거리로 나선 것이죠


여기까지는 시민혁명을 

그린 다른 역사화와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데요



그렇다면 그림 한가운데의 이 여자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최전방에서 시민군을 이끄는 이 여자는

사실 사람이 아닙니다


고대 그리스 자유의 여신을

들라크루아가 상상해서 그린 것인데요


그리스의 여신들이 그랬듯

가슴을 드러낸 의상이나

신발을 신지 않은 모습이 그 증거죠



그가 쓰고 있는 이 프리지안 모자도

중요한 힌트입니다


이것은 ‘자유의 모자’라고도 불리는데요


고대 로마의 노예들이 

주인으로부터 해방되면


자유의 몸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쓰던 모자였습니다


해방과 자유를 상징하는 여신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패션아이템이죠


문제는 이 여자가

여신이라고 하기에는

그다지 성스러워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보통 여신들은

우아한 포즈, 도도한 표정

도자기처럼 깨끗한 피부로 

묘사되어 왔는데요


그림 속 이 여신은 그렇지 않습니다


군데군데 얼룩진 더러운 모습에 

높게 뻗은 팔 아래에는

아주 인간적인 털의 흔적까지 보이죠


전쟁 중이라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여신은 어디에 있어도

여신의 모습을 유지해야 하는 

초월적인 존재로 그려져 왔습니다



이들은 주로 사람들 

머리 위를 떠다니며

고고한 자태로 인간들을 

구경하듯 보여지죠


그에 반해 들라크루아의 여신은

강인하고 힘찬 시민군의 

일부처럼 그려졌습니다


전장의 흙을 몸에 묻혀가며

시민군과 함께 앞으로 

밀고 나가고 있죠


화가가 어떤 의도로 

 그림을 그렸는지는

여신 발밑에 시체들을 보면 

좀 더 명확해집니다



오른쪽에 군복을 입은 두 시체는

왕가의 편에서 싸우던 근위병들로 보입니다


반면, 왼편의 시체는

바지는 물론이고 속옷과 

신발까지 모두 벗겨져 있는 모습이죠


이 때문에 그가 근위병 동료들과 함께 

죽음을 맞이한 것인지,


아니면 시민군의 소속이었는지 

알기 어려운데요


공장 노동자의 것과 비슷해 

보이는 허름한 셔츠를 보아

시민군이었을 것이라는 

짐작만 할 수 있죠


그렇다면 왜 이 남자는 

헐벗겨져 있었을까요?


이는 혁명 당시, 왕의 군대에 비해

모든 것이 열악했던

시민군들의 소행일 것입니다


돌무더기 위 

상체만 드러난 이 청년은

시민군 편에 서 있지만, 

군모를 쓰고 있습니다


손에는 역시 군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좋은 칼을 들고 있죠


제대로 된 무기 하나 없이 

전쟁에 뛰어든 시민들은

전사자의 시체를 

약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쓰러진 자들의 무기를 주워들고

싸움을 이어나가야만 했기 때문이죠



자유의 여신 옆에서

양손에 권총을 든 

어린 소년도 예외는 아닙니다


앳된 얼굴의 이 아이는

어깨에 왕의 문장이 

새겨진 가방을 메고 있습니다


소년이 죽은 군인들로부터 

빼앗은 것인데요


죽음이 두렵지도 않은지,

소년은 여신과 함께 최전방에 서 있지만

그를 보호하려는 어른은 아무도 없습니다


광기가 비치는 

아이의 표정을 보고 있자면

어딘가 씁쓸한 기분마저 들죠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한 

<레미제라블>의 작가,

빅토르 위고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걸까요?




<레미제라블>에는

최전선에서 싸우다 최후를 맞는

구두닦이 소년 가브로슈가 등장하는데요


들라크루아의 그림 속

이 소년에게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가브로슈가 그랬던 것처럼,

그림 속 소년도 곧 쓰러질지 모릅니다


이런 상상이 가능한 것은

들라크루아가 혁명의 어느 편도

더 호의적으로 그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승리자의 시선으로 미화된 

역사를 기록하는 대신


들라크루아는 자국민들끼리 

서로 빼앗고 죽이는

비극적인 장면을 선택했습니다

여신은 시민군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우리가 승리의 희열만을 

기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해주죠


그가 화가로서 이 혁명에 

참여하는 방법이었던 겁니다


그는 거리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전투를

두 눈으로 목격하고 와서

동생에게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내가 조국을 위해 싸우지는 못하지만

그림을 그릴 수는 있다


그리고 작업실에 틀어박혀

3개월 만에 이 대작을 완성합니다


그 결과물은

당대 미술계를 뒤집어놓기에 

충분히 혁명적이었죠


비평가들의 눈에 가장 먼저 띈 것은

그의 화풍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신고전주의 

회화가 유행했기 때문에

들라크루아도 그에 따른 

교육을 받았습니다


신고전주의파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적 사실을 있는 

대로 재현하는 것인데요


정확한 시각적 사실을 

그려야 했기 때문에

선과 형태가 강조됐습니다


색은 그저 선과 형태 사이를 

채우는 장식적인 요소로

최대한 절제하여 사용했죠


들라크루아의 화풍은

이런 그림들(신고전주의)과 

너무도 달랐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앵그르와

들라크루아가 그린

‘파가니니’의 초상화를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확실히 느껴지는데요


앵그르의 파가니니 초상화는

간결한 선을 통해 사진에 가까운

완벽한 균형미를 보여줍니다


이에 반해 들라크루아의 초상은

선이 불분명하고 형태가 

뚜렷하지도 않죠


하지만 강렬한 색채와 

빛의 효과를 활용해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파가니니의 역동성을 잘 포착해냅니다


앵그르는 대상을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표현했지만


들라크루아는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불리던

그의 캐릭터를 표현한 것이죠


사람들은 이것을

로맨티시즘(Romanticism), 

즉 낭만주의라고 이름 붙이는데요


여기에서 ‘Romantic’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의미와는 다릅니다


중세 문학 장르 중 기사도 

소설을 이르는 말인

‘로망스’에서 따온 말이죠


신고전주의 그림이

관객에게 “사실”을 

보여주는 데 집중했다면


낭만주의 화가들은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그림을 그렸습니다



우리가 소설 속 허구의 이야기를 읽으며

감정의 자극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죠


낭만주의의 그림을 본 관객들은

이미지 속 “감정에 공감”하는 방식으로

화가와 소통하게 됩니다


이 소통 방식의 포문을 열었던 작품이

바로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죠


수많은 프랑스 혁명이 

실패를 거듭한 이유는

새로 앉힌 권위자가

다시 이전의 실패를 

답습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번의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해서

갑자기 좀 더 나은 세상이 되지 않았던 거죠


게다가 전쟁의 대가는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 

일상의 파괴와 같은

엄청난 혼란으로 되돌아옵니다


그렇기에 들라크루아는 프랑스 혁명을

승리의 순간으로 기록하지 않았던 거죠


그에게 혁명은 현재 진행 중이며

우리가 자유를 얻기 위해 

무엇을 포기했었는가를

기억하도록 합니다


프랑스인 세 명만 모여도 

혁명이 시작된다는 말처럼




파리는 그 후로도 수많은
혁명의 근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때마다 프랑스인들은
들라크루아의 여신을 소환했죠

시민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나아가는 여신은
이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응원이자
그들이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를
상기시키는 탁월한 기폭제가 됩니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프랑스인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숨 쉬게 된 거죠

프랑스 시민혁명의
민낯을 그린 들라크루아
여러분들은 이 그림 속에서
어떤 감정을 가장 먼저 느끼셨나요?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