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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기도? 아이의 죽음? 만종 속에 담긴 소름 돋는 비밀

조회수 2021. 3. 3. 15:0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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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프랑수아 밀레의 만종

해가 저무는 저녁의 들판과

들판 가운데 기도를 드리는 남녀


두 남녀를 감싼 농기구들과

발 아래 놓인 바구니까지


세상에서 가장 평화롭고

경건한 순간을 그려놓은 듯한 이 그림


장 프라수아 밀레의 <만종>입니다



농사를 마친 농민들이 

하루 수확에 대해

감사기도를 드리는 모습


아주 일상적이고 

목가적인 풍경은

보는 사람의 기분마저 

안락하게 만드는데요


특유의 평화로운 분위기 때문일까요?


아주 일상적인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은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복제되고 팔린 작품으로 손꼽힙니다


실제로 카페나 도서관같이 

평화로운 분위기가 필요한 곳에선

이 그림을 적잖게 만나볼 수 있죠


이 작품의 제목 <만종>은 

저녁에 치는 종을 뜻하는데요


 사실 프랑스의 원제와는 

의미 차이가 있습니다


만종은 한중일에서 

이 작품을 칭하는 제목입니다


프랑스어 원제목은 <랑젤뤼스>로

가톨릭에서 사용되는 기도문의 이름인데요



이는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하는 장면

이른바 ‘수태 고지’를 담은 기도입니다


가톨릭 국가였던 19세기 프랑스

일상적으로 아침, 점심, 저녁으로

교회에서 종을 치면 감사기도를 했습니다


이를 ‘삼종기도’라고도리고도 하는데요


이 작품은 원래 1857년

미국의 화가 토머스 애플턴의 

의뢰로 만들어졌습니다



아일랜드 출신 이주자였던 

토마스 애플턴은 19세기 아일랜드에 

불어닥친 감자 기근에서 영향을 받아

작품을 의뢰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처음 의뢰했을 때의 제목은

‘감자 수확을 위한 기도’였죠


하지만 정작 작품이 완성된 뒤

애플턴이 여러가지 사정으로 인해 

이 작품을 사지 않습니다


이때 밀레는 이 그림을

‘삼종기도를 위해서 일을 

멈춘 남자와 여자’라 다시 이름붙입니다


이후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하면서

‘저녁의 삼종기도’라 이름이 바뀌었죠


현재 이 작품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사랑을 받은 것은 아니었죠


작품을 만들던 시기

밀레는 물감을 살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더군다나 작품이 판매되지 않자

생활고는 더해졌죠


이를 안타깝게 여긴 한 

컬렉터가 1천 프랑을 주고

선심껏 이 작품을 대신 사들이는데요


이 작품은 이 이후로도 

인기가 없었습니다


헐값에도 팔리지 않았고

아주 많은 전시장과 수집가의 

손을 오가는 신세였죠


소장자 중 한 사람이었던 

쥘 반프라에는 만종을 구입한 후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치 종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시끄럽단 이유로 밀레의 다른 작품으로 

교환하기도 했습니다


밀레가 그림을 시작했던 

19세기 초는 아름답고 

낭만적인 화풍이 일반적이었는데요



신이나 귀족의 모습을 

화려하고 웅장하게 담아냈고

사람들의 시선을 이끄는 

작품들만이 칭송받았습니다


밀레도 초기에는 이런 아름답고

낭만적인 화풍을 따라

 많은 그림을 그렸습니다


주로 도시에서 귀족의 

초상화를 우아하게 그려주며

생계를 이어나갔는데요


하지만 이 시기 다른 작가들과 

차별화되지 못하며

그저그런 화가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결국 중년까지는 이렇다 

할 빛을 보지 못하고

가난한 화가로 살아야만 했죠


서른이 가까워진 1843년에는

파리 살롱에서 작품 전시를 

거절당하고 아내인 폴린이 

페병으로 세상을 떠나기도 합니다


계속되는 삶의 불운 속에서

시골 출신 밀레는 도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죠


19세기 중반에 들어서며 

밀레의 관심은 자신이 나고 자란 

농촌으로 향하기 시작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바라본 농촌의 풍경


그리고 그 안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농부들


도시의 화려함을 떠나

자신의 눈에 아른거렸던 농촌의 일상을

화폭 속에 담았죠



밀레가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받기 시작한 건

이 시기부터였습니다


당시 밀레의 농촌 그림이 

주목받기 시작한 건

프랑스의 정세와도 관련이 있는데요


1848년 프랑스는 2월 혁명과 함께

자본가와 노동자 계급이 갈라지고 

투쟁하는 혼란한 시기였습니다


투쟁과 새로운 권력의 주도권에 대한

세상의 관심이 집중되던 시기였죠


그런 와중에 밀레는 노동자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을 선보인 셈입니다


노동이 일상인 농촌의 풍경과

그 안에서 성실하게 땀을 흘리는 사람들


또 이를 낭만적이기보다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밀레의 화풍은 많은 관객들에게 

깨우침을 줬습니다


이에 따라 밀레는

당시 진보 세력으로부터 

지지를 받기 시작했죠


밀레의 농촌 그림들이 인기를 

끈 이유는 또 한가지가 있는데요



혁명과 함께 새로운

권력계층이 된 평민들은

농촌이나 시골 등 노동의 현장에서

나고 자란 경험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신화처럼 먼 세상의 이야기보다

자신의 고향, 자신이 일하던 곳을 그린


향수를 자극하는 농촌의 

그림들을 선호했죠 


덕분에 밀레가 그린 농촌 그림은

새로운 권력계층 사이 

인기를 끌게 되었습니다


1848년 내놓은 ‘키질하는 사람’은 

정부가 직접 구입하기도 했는데요


이는 정부 권력계층에 

새로 들어선 평민계급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면서


국가가 ‘노동’의 가치를 

중시한다는 걸 내비치기 위한 

의도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밀레는 ‘농촌 화가’로서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죠


하지만 이런 그림을 보며 

당시 프랑스 미술계는

밀레의 그림들을 위험하고 

선동적인 그림이라며

비판했는데요


대표적인 것이 밀레의 

또다른 명작 <이삭줍는 여인>입니다


땡볕 아래 고된 노동으로

검게 그을린 투박한 손과


굽힌 허리가 아픈지 이삭을 쥔 팔을

등에 대고 있는 여인


이 들은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

가장 어려운 경제 상황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여인들 너머엔 풍요로운 보리 더미들과

말을 탄 감독관이 대조를 이루는데요.


여인들의 모자와 옷의 색은 

파랑, 빨강, 흰색으로

프랑스 혁명의 깃발 색을 

상징하는 듯 보입니다


보수적인 평론가들은 이를 보고

밀레가 그림을 통해 

빈부격차를 나타내 계층간의 갈등을 

조장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밀레를 사회주의 좌파라 여겼고

그의 그림들은 정치적으로 해석되었죠


하지만 그 당시 이삭줍는 

여인을 즐겨 그렸던

프랑스 화가 쥘 브르통의 그림은

오히려 환영을 받았는데요



그의 그림 속 여성들은

풍성하게 이삭을 줍고 돌아오며

보람찬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고단한 표정은 보이지 않고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죠


하지만 밀레의 그림들은 좀 달랐습니다


양을 돌보다 지팡이에 기대

숨을 돌리는 안쓰러운 소녀

 (<지팡이에 기댄 양치기 소녀>)


빨래감을 둘러매고 

귀가하는 여인들 (<빨래하는 여인들>)


소 에게 물을 먹이는 여인 등

 (<소 물 주는 여인>)


밀레의 많은 그림들은

농촌의 삶이 몹시 고되다는 사실을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죠.


각양각색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변화와 함께

밀레의 명성과 성공은 

1860년대까지 계속해서 자라났습니다


1867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서 그 정점을 찍게 되죠


이 시기에 밀레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작품들이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인기는 밀레의 사후에도 이어져

헐값에도 팔리지 않던 그림은

전세계 미술계의 베스트셀러가 되었죠




하지만 의외의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밀레는 사회주의 등 

정치 사상에 대해서

관심조차 없는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밀레가

농촌에서 보고 자랐던 농민에 

대한 깊은 이해와 관심을

그림으로 그린 것 뿐이었죠.


당시 밀레처럼 사실주의 화가였던 

귀스타브 쿠르베는 작품에 

노동자의 고통과 사회 비판을 담고

사회 운동에 참가하는 등

정치에 적극적이었는데요


이와 반대로 밀레는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저 자신이 겪고 목격한 것들을 

그림 속에 담아내는 데만 집중했습니다


<만종>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밀레는 한 인터뷰에서 이 그림이

어릴 적 종소리가 울리면 

일손을 멈추고 기도하던

자신의 할머니를 회상하며 

그린 그림이라 말했죠


밀레가 그린 농촌의 정경 속에는

밀레가 바라보았던 농촌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이러한 그림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사는

순수한 인간의 삶을 발견하고

<만종>을 칭송한 화가들도 많았습니다.


 (고흐가 모사한 <씨 뿌리는 사람>)

농촌과 농민을 사랑한 빈센트 반 고흐는

밀레를 만난 적도 없지만

그를 스승이라 부를 만큼 좋아했습니다


실제로 <만종>을 시작으로 

많은 그림들을 따라

그린 모습도 확인할 수 있죠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도

이 그림에 빠져들었던 

관객 중 하나였는데요


살바도르 달리는

유독 <만종>에 깊은 관심을 가져서

그에 관한 책을 출판하고

오마주한 작품들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주 

독특한 해석을 내놓았는데요


마냥 평화롭게만 보이는

이 그림이 아주 비극적이라 말했죠


달리는 이 그림을 그린 밀레가

현실을 적나라하게 그려나갔던 

화가임을 근거로 내세웠습니다


때문에 밀레가 평화롭고 

낭만적인 모습으로

농민들을 그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죠


달리는 만종의 두 사람이

감자 바구니가 아닌 땅 

속에 묻힌 아이를 보며

슬피 기도를 올리는 모습이라 말했습니다


기근과 질병을 벗어나지 

못하는 농민들의 삶을

적나라하게 표현했단 것이었죠


평소에도 장난끼가 많았던 탓에

사람들은 달리의 주장을 

우스갯소리처럼 취급했지만

달리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결국 달리의 끈질긴 주장 덕에
작품을 소장하고 있던 루브르 박물관은
엑스레이 분석을 진행하는데요

신기하게도 달리의 말처럼 바구니 주변엔
관과 비슷한 형태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아이 한명이 들어갈 법한 
아주 작은 형태의 틀이었죠

물론 그 형태가 불완전하여
정말 이것이 관을 그린 것인지 
알 수 없었는데요

대부분의 학자들은 달리의 가설을
정설로 받아들이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만종이 마냥 평화로운 
모습만을 그린 것은
아니라는데 동의했죠

이는 실제로 밀레가 후원자였던
알프레도 상시에와 나눴던 
편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총 600통이 넘는 편지 속에서 밀레는
힘들게 일하는 농부를 
끊임없이 동정하고
비참한 농촌생활을 슬퍼하는 
내용을 전했습니다

특히나 만종을 그리던 당시엔 
이런 편지를 상시에에게 보냈죠



<만종>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던 

농촌을 그렸던 예술가


밀레는 꾸며진 세상보다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만졌던 현실을 사랑했습니다


생을 다할 때까지 자신의 눈에 

들어온 농민과 농촌의 삶을

화폭 속에 옮겨 놓았죠


그만의 시선으로 담겨진 농촌의 풍경은

세상에 없던 경건함과 평화로움을 전하며

많은 이의 영감이 되었는데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밀레의 그림에 

다양한 해석을 내놓는 이유는

밀레가 사랑했던 현실 속에 

함께 빠져들었기 때문입니다



밀레는 숭고한 감정으로 
현실을 평범하게 담아내는 것이
예술에 진정한 힘을 더한다 말했습니다

고단한 현실 속에서도
무사히 하루를 마치고

잠시 멈추어 감사기도를 
드리는 가난한 농부들

이것을 바라보는 밀레의 숭고한 마음이
이 작품 속에 담겨 있습니다

밀레가 사랑한 농촌의 현실 속에서
여러분은 어떤 모습이 보이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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