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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의 엔딩은?

조회수 2019. 11. 8. 08: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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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이 선택한 해피 엔딩
출처: <82년생 김지영>

아이 옷을 삶고, 쓰레기통을 비우고, 청소기를 돌리고, 어지럽혀진 방을 정리한다. 시간을 ‘순삭’하듯 빠르고 신속하게 이어지는 가사 노동의 풍경. 그리고 폭풍처럼 지나간 시간으로부터 잠시 등을 돌리듯 창밖을 바라보는 여자의 얼굴에 지치고 고된 시간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담담한 피로감과 원숙한 고단함. 영화는 그렇게 시작된다. 연이어 날아드는 꽉 찬 직구처럼, 긴밀하게 이어진 다섯 컷만으로도 누군가의 삶이 온전히 읽히는 듯한 오프닝 시퀀스. 창밖을 바라보던 여자가 지긋이 눈을 감자 떠오르는 제목, <82년생 김지영>. 그렇다. 그 영화다. 개봉 전부터 주연을 맡은 배우를 향한 악플이 쇄도하고, 밑도 끝도 없는 비난부터 받았던 그 영화 <82년생 김지영>. 역설적이지만 이 모든 현상이 이 영화가 지금 존재해야 할 의미를 다시 한번 증명하는 것 같았다. 


<82년생 김지영>은 제목 그대로 김지영(정유미)이라는 여성에 관한 영화다. 김지영은 허구적인 세계 속에 자리한 특정한 개인이지만 현실의 여성들을 대변하는 총합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그는 매일같이 육아와 가사를 해결하는 전업주부다. 집안일을 하고 아이를 돌보는 하루하루가 쳇바퀴처럼 돌아간다. 남편의 아침을 차려주고 출근시킨 뒤 잠시 앉아 한숨을 돌리니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하루 일과가 다시 시작됨을 알리는 알람처럼. 그나마 자상하고 배려심 많은 남편 정대현(공유)은 아내의 고생을 덜어주려고 노력한다. 일찍 퇴근해 집에 돌아와서 어린 딸의 목욕을 돕고, 시댁에서 고생하는 아내를 위해 어머니 눈칫밥을 먹으면서도 설거지를 대신한다. 하지만 대현에게 가사는 ‘해줄게’라며 도와주는 일이다. 지영은 어쩔 수 없는 벽을 느낀다. 그래도 하루하루가 그럭저럭 흘러가는 것 같다. 정작 김지영만 모르는 김지영의 문제를 알기 전까진. 


“그냥 옛날 생각 자꾸 나고, 해 질 무렵에는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데, 그래도 괜찮아.” 아내 지영의 말을 듣는 대현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아내만 몰랐다. 자신이 이상하다는 것을. 아내는 언젠가부터 자신이 아닌 존재가 돼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장모님이었다. 장난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귀신이 들린 것인지, 병에 걸린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아내에게 문제가 생긴 건 확실했다. 그래서 대현은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아내를 대신해 의사를 찾아간다. 아내의 증상을 말하고 상담을 받는다. 남편은 고민한다. 아내를 치료받게 하고 싶지만 상처를 입히고 싶진 않다. 그 와중에 지영은 회사에 출근하는 젊은 여자를 보며 자신이 다니던 첫 회사에서의 기억을 떠올린다.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는 무언가가 느껴진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82년생 김지영>은 올해 한국 영화계가 수확한 성취 중 하나라 해도 부족함이 없는 작품이다. 원작의 순행적인 서사를 반복적인 플래시백 구조로 재구성하며 영화만의 화법을 확보한 각색, 미려한 시선과 담담한 온도를 일관성 있게 유지하는 연출에는 빠지는 구석이나 지적할 만한 흠이 딱히 없다. 무엇보다도 영화에 생생한 숨을 불어넣은 배우들의 호연은 <82년생 김지영>이 주목하는 일상의 풍경과 현실의 고민을 살아 있는 울림으로 끌어올린다. <82년생 김지영>을 여는 마스터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정유미는 극사실적인 존재감을 통해 인물에 대한 깊은 공감대를 이끌어낸다. 

<82년생 김지영>은 결국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자 우리 모두에게 가능한 해피 엔딩이다.

또한 정유미의 호연에 성실하게 리액션하는 공유는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적절한 선을 유지해내며 제 역할을 충실히 이행한다. 어떤 점에서는 원작의 텍스트가 원만하게 설득하지 못했던 지점까지 해결해주고 있다는 인상도 받는데 이는 영화가 활자로는 느낄 수 없는 일상의 디테일까지 생생한 시각적 언어로 전달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육아와 가사라는 전쟁에서 지지 않기 위해 치열한 하루를 보낸 김지영의 얼굴은 담담하지만 언제 묻었는지 모를 옷의 얼룩에는 고단한 하루가 고스란히 배어 있다. 덕분에 영화는 보다 직관적으로 현실을 체감하고 환기시키는 작품으로 거듭났다. 


<82년생 김지영>은 한국 사회에서 여성들이 감내해야 하는 고충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면서도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장을 열어주고자 마련된 무대 같다. 여직원이 타 온 커피를 마시면서 육아휴직을 마치고 돌아온 여직원 앞에서 ‘엄마가 키우지 않으면 반항심이 생긴다’는 말을 농담이랍시고 하는 남자 상사의 파렴치함과 졸업을 앞둔 딸의 취업 가능성이 불투명하자 속상한 마음을 감추고 시집갈 준비나 하라는 아버지의 엇나간 부성애가 교차한다. 마음을 쓰는 결은 다르지만 동일한 관성에서 비롯된 말은 결국 여성이라는 존재가 육아와 가사의 주체여야만 한다는 구태의연한 뿌리에서 자라난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들의 혐오를 비난하거나 힐난하는 것보다 오랜 시간 동안 혐오를 감당하며 살아온 여성들의 얼굴과 인생을 마주하길 권한다. 그것이 여성 혐오라는 걸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세대와 그것이 여성 차별임을 생각해볼 필요도 없었던 시대를 거듭 감당해야 하는 여자들의 굳은 얼굴, <82년생 김지영>은 그 얼굴을 통해 시대를 비추는 영화다. 그럼으로써 공중화장실 곳곳에 몰카가 없는지 살펴야 하는 여자들의 끔찍함과 ‘맘충’이라는 혐오까지 뒤집어쓴 채 육아를 감당해야 하는 엄마들의 비참함이 방치되고 있는 사회적 현실을 환기시킨다. 부조리한 현실을 인내하는 여성들의 주변에 산재한 차별과 혐오가 결코 그들 개인이 감당해야 할 문제가 아님을 실감하게 만든다. 당연한 것이라 치부함으로써 되레 당연하게 해결되지 않았던 문제의 심각성을 환기시킨다. 뉴스 속의 사건이 아니라 사람이 처한 현실임을 깨닫게 만든다. 이해가 아닌 공감을 권한다. 


이렇듯 <82년생 김지영>은 한국 사회와 가정에 방치된 오랜 비극에 관한 이야기다. 그 주인공이 여성인 이유는 한국 가정사의 오래된 비극의 볼모가 바로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육아라는 전쟁과 출산이라는 지옥 안에서 집안일 하는 사람으로 규정돼버린 엄마 세대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요즘의 여성들은 전통적 가치관을 고수하는 가족 문화 전체와 대립하거나 포기해야 하는 억울한 상황에 놓여 있다. <82년생 김지영>은 바로 그런 체제의 중력에 저항할 겨를도 없이 끌려들어간 여성에 관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한국의 가족 신화를 지탱하기 위해 대를 이어 가사 노동에 투입되길 강요당하는 현대 여성들의 괴리감을 마주한다는 것은 그런 입장을 강요당하는 여성 당사자들에게는 생생한 재현일 것이다. 또 그런 입장을 방관해온 가족 구성원들에게는 뚜렷하게 초점을 맞춰보는 경험일 것이다. 

<82년생 김지영>은 결국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자 우리 모두에게 가능한 해피 엔딩이다.

엄마와의 전화 통화 중 아침을 먹었느냐는 엄마의 물음에 지영은 어린 딸의 밥을 먹이면서 같이 아침을 먹었다고 답한다. 엄마 역시 꼬박꼬박 아침을 챙겨 먹는 남편 덕에 늘 아침을 먹는다고 말한다. 누군가의 밥을 지어 먹이는 엄마의 삶을 이어가는 모녀의 통화를 듣게 될 어떤 관객은 생각해볼지도 모르겠다. 그 누구의 엄마가 아닌, 그들이 꿈꿨던 인생을 말이다. 한편 아버지의 말만 듣고 누나가 좋아하는 것이 팥빵인 줄 알았던 아들은 누나에게 팥빵을 사 들고 가서야 알게 된다. 누나는 크림빵을 좋아했다는 것을. 팥빵은 자신이 좋아했다는 걸. 그렇게 지난 세월을 돌아본다. 낡은 시대의 관성을 무심히 받아들이는 입장이었다는 뒤늦은 죄책감과 그런 관성에 밀려 원하지 않는 자리로 밀려난 이들의 소외감이 비로소 교차한다. 그렇게 알게 된다. 우리는 서로 하지 못한 대화가 많다는 것을. 


<82년생 김지영>은 그렇게 맑은 종과 같이 울리는 물음표를 쥐여주고 말을 거는 영화다. 나와 우리 모두가 알아야 하는 어떤 이야기.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감당하는 법에 익숙해진 여자들과 잘 몰랐기 때문에 방관하는 데 익숙해진 남자들의 시대는 지났다고, 그러니 새로운 시대를 나란히 걷자고 손을 내민다. 온화하면서도 단호하게. 영화가 원작보다 따듯한 결말을 선택한 건 그래서다. 그 결말은 결국 객석의 관객을 향해 내미는 손이다. 그 누구의 무엇이 아닌 너와 나로서, 서로의 가능성을 존중할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다는 제안. <82년생 김지영>은 결국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자 우리 모두에게 가능한 해피 엔딩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팥빵이 아닌 크림빵을 들고 찾아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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