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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10배 차이나는 적 꺾은 이순신, '명량'을 철저히 파악

조회수 2019. 1. 19. 17:4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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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패 가른 건 '정보력'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1904년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 함대 발틱 함대를 참패시키며 러일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 과정에서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했음은 물론이고 정보시스템 활용과 그에 기반한 치밀한 전투계획이 돋보였다. 당시 러일 해군의 전력차는 크지 않았으나 전투의 결과는 그 한 끗차이로 인해 현저히 갈리게 됐다. 전쟁에 있어 정보를 활용해 미리 대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도고 제독 이전 이미 이순신 장군이 철저히 정보에 기반해 더 큰 승리를 거둔 바 있다. 승리의 규모 측면에서도 이순신 장군은 12척 대 130척이라는 10배 이상의 전력 차를 극복하고 압승을 거뒀다. 이런 놀라운 결과를 낼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객관적인 정보에 기반해 창의적 해결책을 마련할 수 있었던 그의 능력이 있었다.

러일전쟁의 분수령이 된 쓰시마 해전... 도고 제독은 어떻게 발틱 함대를 완파했나

러시아 황제는 격분했다. 일본이 러시아를 향해 전쟁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유럽 발트해(Baltic Sea)에서 황제의 함대가 한반도 동해안을 향해 출발했다. 러시아는 발틱함대를 투입해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고 황제의 체면을 살리려 했다. 태평양함대만으로는 일본함대에 대항하기 어렵다고 생각해 발틱함대를 추가로 파견한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일본을 제압하기 위해서 블라디보스토크에 황제의 함대를 더 많이 배치하려 했다.


황제의 위엄을 전달하기에 3만3000㎞의 길이는 너무 멀었다. 대륙 세 개를 경유한 것이다. 10월15일 유럽에서 출발한 발틱함대는 대부분이 증기선이라 중간중간 석탄 공급이 필요했다. 수시로 석탄을 보급할 수 있는 항구가 필요했다. 선발대는 영국과 협상이 풀리지 않아 아프리카를 돌아서 아시아를 향해 이동했다. 출발한 지 7개월이 지나서야 대한해협에 닿을 수 있었다. 이동 중 한반도와 일본의 해상조건에 맞는 전투연습을 제대로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출처: 위키피디아
(러시아 발틱함대의 이동경로와 쓰시마 해전의 위치)

반면 일본의 해군제독 도고 헤이하치로는 발틱함대에 승리하기 위해 1년 가까이 준비한다. 러시아함대가 지나갈 것으로 예상되는 주요 해로마다 정보시스템을 가동했다. 지도상 경위도 10분씩 구분해 구역번호를 정하고 구역별로 함정을 식별할 수 있도록 했다. 일본 군함들은 완벽하게 수리를 마쳤고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하고 단독, 소규모, 함대별로 엄격한 훈련을 반복했다. 전투계획에 따라 통신, 어뢰공격, 기동훈련을 기상이 허락하는 한 거의 매일 실시했다. 함대의 진형유지, 종렬이동, 가상훈련을 통해 다양한 모의전투를 수행했다.

출처: 국방부 국사편찬위원회
(쓰시마해전 양국 전력 비교)

러시아 태평양 함대와 일본함대는 전력상 차이가 거의 나지 않는 막상막하의 대등한 전력이었다. 그러나 1905년 5월27일부터 28일에 걸친 쓰시마해전에서 일본함대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머쥔다. 러시아는 8척의 전함과 5000명 이상의 병력을 잃은 반면 일본은 겨우 3척의 어뢰정과 116명의 병력을 잃었을 뿐이었다. 철저한 준비와 정보활용 덕분에 얻을 수 있었던 대승이었다.

명량 일대의 바닷속 샅샅이 파악... 이순신은 정보로 10배의 적을 깼다

출처: 동아일보DB
(이순신 장군 영정)

정유년(1597년)의 전쟁상황은 긴박했다. 7월 거제도 칠천량에서 조선수군 300척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수많은 지휘관과 병력들이 몰살당했고 원균도 이날 전사했다. 일본수군 입장에서는 이제 칠천량에서 도주한 패잔병들에게 남은 허술한 12척의 전선만 쓸어버리면 되는 상황이다. 일본 수군은 칠천량 전투 이후 곧바로 압도적인 전력을 결집시켜 명량해협 직전인 어란진까지 진지를 전진배치한다. 그러자 어란진에서 30㎞ 떨어져 있는 진도 벽파진에 진지를 틀었던 이순신은 전략적 고려에 따라 전라우수영을 서해안에 가까운 울돌목 안쪽으로 이동시킨다.

(명량해전 가상도)
그러나 그러한 지형을 끼고 싸우는 것만으로 승리는 손쉬운가? 이순신 장군의 탁월한 안목은 단순히 환경을 파악하는 것에 있지 않았다. 하루에 네 번 뒤바뀌는 조류의 특성, 시간대별 유속의 변화, 적군 전선의 특징, 예상 전투대오, 상황별 세부적인 작전지침을 마련하는 창의적인 정보 '활용'이 핵심이었다. 
(정유년 주요 사건과 연안의 조류속도 분포도)

위 지도는 한반도 남단 해안선을 따라 주요 해협, 수로, 항만에서 관측한 조류(潮流)의 속도를 표현하고 있다. 명량해협은 세계에서 다섯 번째 안에 드는 빠른 조류가 흐르는 곳으로 조류의 속도는 최대 11노트(knot)로 시속 20.4㎞다. 자동차 속도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시속 20㎞는 둔감한 빠르기일 수 있다. 그러나 물이라는 개념으로 볼 때 11노트는 전혀 다른 속도감을 준다. 한강에 홍수가 와서 상류의 수문을 잔뜩 열었을 때 최대 유속은 0.9노트이고 평상시의 유속은 0.5노트이다.5 명량의 최고 조수속도 11노트는 한강에 홍수가 났을 때 유속보다 12배 빠르다는 의미다.


국립해양조사원이 발간하는 <한국연안 조석표>에는 명량조수가 밀물과 썰물로 바뀔 때 보통 9.6노트의 속도를 내는 것으로 관측됐다. 국립해양조사원과 해군사관학교는 명량해협의 6개월간 조류 데이터를 분석해 명량해전 당시의 조류현상을 예측하는 공동연구를 진행했다. 이 연구에 따르면 명량해전 당일은 오전 6시30분부터 남해안에서 서해안쪽으로 밀물이 시작돼 오전 10시10분경에 최고속도를 내다 유속이 느려져 12시20분경 서해안에서 남해안 방향으로 물살이 바뀌기 시작한다. 정오를 전후로 바닷물의 방향이 조선수군에게 유리한 썰물로 바뀌는 것이다. 14시40분에는 가장 강력한 썰물이 일본 전투선들이 대오를 형성한 쪽으로 역류한다. 18시56분에 유속이 거의 제로에 가까운 정체상태를 유지하다가 다시 밀물로 바뀐다고 예측했다. 


연구 결과대로 상상해보면 이순신 장군은 남해안에서 서해안으로 밀물이 흘러나갈 때 그 물살의 흐름을 따라 울돌목으로 진입해 들어오는 일본수군을 순순히 맞이하며 정오 무렵 일자진으로 대치한다. 섣부른 공격 대신 대롱처럼 비좁은 울돌목 해협에 일본수군 130척이 모두 들어와 대오를 형성한 것을 확인한다. 비좁은 해협 안으로 대략 10척씩 10줄 이상 대열을 형성했을 것이다. 다시 강력한 물살이 서해안에서 남해안으로 흘러 일본수군의 뱃머리 쪽으로 조류가 역류할 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오후 2시40분 가장 강력한 조류가 일본대오를 향해 쏟아져 들어간다. 한강의 만조홍수에 만나는 유속의 11배에 가까운 속도로 물밀 듯 뱃전을 뒤흔든다. 적군의 대오는 조선군의 화포뿐만 아니라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물의 힘과 맞서 싸우다 비좁은 해협에서 서로 부딪히며 깨지고 부서져 침몰하게 된다. 


소설가 김훈은 이 장면을 실감나게 묘사했다. 

출처: 영화 <명량> 공식 예고편 캡처
물결은 말처럼 일어서서 뒤로 달리기 시작했다. 밀집대형을 이룬 적의 대열이 거꾸로 흐르는 역류에 휩쓸리면서 서로 부딪혔다. 뒤로 밀리는 적선들이 불타는 적선들과 부딪히면서 깨어져나갔다. 적들은 뒤엉켜서 부서지면서 밀렸다. 나는 일자진으로 밀어붙였다. 살아남은 적들은 저무는 해남 바다 쪽으로 달아났고, 죽은 적들의 시체는 와류에 휩쓸렸다.

수적으로 열세에 처한 조건에서 명량을 등에 지고 진지를 구축할 수 없다는 <난중일기>의 기록은 이순신 장군이 ‘명량(울돌목)’의 자연환경적 특성을 이미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음 증언한다. 10배 이상의 전력격차를 감당하며 이순신 장군이 의연함과 평정심을 유지한 까닭은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사람이라도 두렵게’ 할 수 있는 작전구상이 완료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광화문 이순신 동상 사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 해군 제독을 지낸 니미츠(Chester Nimitz)는 진주만 공습 이후 일본 해군에 비해 현저하게 열세에 놓였던 함대를 지혜롭게 운영해 결국 전세의 역전을 이끌어냈다. 니미츠는 접견실에서 자신을 만나기 위해 대기 중인 장교들을 위해 3가지 질문을 벽에다 걸어놓았다. 1) 계획된 작전은 성공 가능성이 있는가? 2) 실패했을 때 어떤 결과가 예상되는가? 3) 물자와 보급의 측면에서 실행 가능한가? 니미츠는 그의 책상 유리 밑에 ‘목표, 공세, 기습, 접촉점에서 병력의 우위, 단순성, 보안, 기동, 병력의 경제적 활용과 협조’라는 글귀를 적어 평상시 전투에서 고려해야 할 사항들에 대한 체크리스트를 비치해놓았다.


니미츠는 명료한 핵심질문과 체크리스트를 통해 열세의 상황을 인내하며 전세를 바꿔 나갔다. 반면 이순신은 천혜의 자연조건을 창의적으로 활용해 1대10의 전략 차를 극복했다. 승부처를 만나는 상황은 저마다 다르고 동원할 수 있는 자원도 다르며 리더들의 기질도 서로 다르다. 그럼에도 눈부신 역전의 사례에는 창의적인 리더십이 발견된다. 비관적인 상황에서 '사실'을 '사실'대로 받아들이며 평정심을 유지해야 창의적 리더십이 빛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순신 장군을 통해 배운다. 

출처 프리미엄 경영 매거진 DBR 138호
필자 송규봉 GIS United 대표

인터비즈 오종택 장재웅 정리

inter-biz@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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