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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도 처남도 죽인 태종의 칼을 비켜간 '이 사람' , "대체 어떻게?"

조회수 2019. 11. 19. 17: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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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R/동아비즈니스리뷰] 창업기의 재상은 언제나 위태로운 자리다. 대업을 함께 이루는 과정에서 쌓은 재상의 지분이 왕권 강화에 방해가 되고, 재상이 가진 뛰어난 재능도 군주에게는 의심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 정도전 숙청 이후, 태종 이방원과 함께 조선의 설계도를 마저 그려나간 재상 '하륜'은 그렇기 때문에 더욱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친인척과 공신을 가리지 않고 휘두르던 의심 많은 왕 태종의 칼이 하륜만은 비켜갔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담은 DBR 152호 기사를 요약해 소개한다. ☞원문 기사 더보기

이방원과 '왕자의 난'을 함께한 하륜, 재상에 오르다

1398년 여름, 어느 집에서 떠들썩한 잔치가 열렸다. 충청도 관찰사로 임명된 집주인을 환송하는 자리였다. 집을 가득 채운 손님 중에는 훗날 태종이 된 태조의 다섯 째 아들 정안군(靖安君)도 있었다. 그가 집주인에게 술잔을 건네는 과정에서 술에 취한 집주인이 비틀거리다 정안군 쪽으로 술상을 엎어버리고 말았따. 옷이 잔뜩 더럽혀진 정안군이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자 놀란 집주인은 “왕자께서 노하시어 가셨으니 얼른 가서 사죄를 드리고 오겠다”라며 뒤따라 나섰다.

출처: 네이버 영화 '관상' 스틸컷

사저로 돌아온 정안군은 자신을 쫓아온 집주인에게 짐짓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엇 때문에 왔는가?” 그러자 집주인은 언제 술에 취했었냐는 듯 차분하게 대답했다. “지금 왕자께서 처해 계신 상황이 매우 위태롭습니다. 제가 술상을 엎은 것은 장차 있을 경복(傾覆) 할 환란에 대해 따로 말씀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정안군이 몸을 바로 하며 대책을 물으니 집주인은 “신은 충청도로 부임하라는 어명을 받았기 때문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마침 안산군수 이숙번이 정릉(貞陵)을 이장할 군사를 거느리고 한양에 와 있으니 이 사람에게 대사를 맡기시면 될 것입니다. 신 또한 진천(鎭川)에서 대기하고 있겠사옵니다. 일이 시작되면 신을 부르소서”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출처: 채널A '천일야사'

얼마 후인 1398년 8월 26일, 정안군은 이숙번의 지원을 받아 정도전 등 자신의 반대세력을 숙청했다. 이것이 1차 왕자의 난이다. 이날 정안군은 경복궁 남문 앞에 군막을 치고 정변을 지휘했는데 자신 옆에 장막을 하나 더 설치하도록 했다. 누구를 위한 군막인지 사람들의 궁금증이 더해질 무렵, 충청도로 내려갔던 집주인이 나타나 당연하다는 듯 그 가운데 앉았다. 이 집주인이 바로 하륜(河崙, 1347∼1416)이다.


하륜은 이때 세운 공로로 정사 1등공신(定社一等功臣)에 오른다. 그리고 2차 왕자의 난이 벌어지자 신속히 임금 정종의 지지를 이끌어내 반군을 무력화시켰다. 그렇게 그는 좌명 1등공신(佐命一等功臣)에 봉해진다. 이후 하륜은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가 돼 조선의 관직제도를 새롭게 정비했으며 태종이 안정적으로 권력을 승계할 수 있도록 정지작업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태종이 조선의 세 번째 군주로 즉위하게 되면서 하륜은 재상이 된다. 그는 좌정승과 영의정부사를 12년간 지내며 태종조의 정국운영과 정책결정 과정을 주도했다.

하륜은 음지의 인물?

하륜은 여러모로 정도전과 비교된다. 두 사람 모두 조선왕조 건국 초기에 각종 법과 제도를 기획·설계하고 국가 시스템 구축을 주도한 ‘설계자형’ 재상이다. 또 각각 태조와 태종이라는 두 창업군주의 핵심참모였으며 그 치세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정도전이 '불세출의 경세가', '비운의 혁명가'라는 이름을 얻은 데 비해 하륜은 ‘모사’, ‘책사’의 이미지가 강하다.

이러한 하륜의 이미지는 분명 사실(史實)에 근거한 것이기는 하다.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은 하륜을 두고 “아름다운 모책이나 은밀한 의논을 임금에게 아뢴 것이 대단히 많았고 물러 나와서는 이를 절대 남에게 누설하지 않았다”고 묘사하는데 여기서도 그가 막후 책략가적인 면모가 강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륜을 어딘가 정당하지 못한 음지의 인물로만 단정해서는 안 된다. 방향과 태도, 방법의 차이가 있었을 뿐 그 역시 성리학적 이상을 실현시키고자 했던 유학자였고 학문이나 정치력 모두 정도전에게 뒤지지 않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정도전이 조선의 문물과 제도를 설계했다고 하지만 그는 건국 7년 만에 권력투쟁에서 패배해 죽음을 맞이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륜이 정도전의 빈자리를 메웠다. 정도전이 구상했던 사회개혁의 폭과 깊이를 좁혀 놓았다는 비판이 없지는 않지만 이후 조선의 근간이 된 통치체제, 신분제도, 인재선발제도, 사회운영제도 등은 모두 하륜의 손을 거쳤다.

출처: 채널 A '천일야사'
태종에 의해 귀양 보내진 이숙번

사실 이러한 창업기의 재상은 매우 위태로운 자리다. 익히 잘 알려져 있다시피 태종은 왕권 강화와 후계자 보호를 위해 자신의 측근들을 가차 없이 숙청한 군주다. 자신을 위해 얼마나 많은 헌신을 하고 공을 세웠는지, 자신과 얼마나 가까운 친척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출처: 위키피디아
이색. 이색 비문 사건은 하륜과 권근이 그들의 스승 이색을 위해 쓴 행장(行狀)과 묘지명에 태조 이성계를 비난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는 대간들의 탄핵에서 시작됐다.

태종의 권력 획득 과정에 크게 기여한 이거이와 이저 부자, 병력 동원의 공로자 이숙번이 삭탈관직을 당한 채 귀양을 갔고 심지어 핵심공신이었던 처남들에게 태종은 자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하륜은 정치판을 뒤흔들고, 정변을 성공시킬 정도의 뛰어난 지략을 지녔으며,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힘을 행사했지만 자신의 주군인 태종으로부터 변함없는 신뢰와 보호를 받았다.


하륜은 태종의 처남 민무구, 민무질이 숙청당할 때 연루됐지만 경고를 받는 것으로 끝났고 최대의 정치적 위기였던 ‘이색(李穡) 비문’ 사건에서도 살아남았다. 당시 권근은 이미 사망한 후였기 때문에 비난의 화살은 하륜에게 집중됐다.


하륜은 자신이 언급한 것은 태조가 아니라 정도전과 조준이라며 네 차례에 걸친 장문의 변호 상소를 올렸다. 태종은 그의 장황한 변명을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이를 수용했고, 하륜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륜은 1416년(태종 16)에 70세의 나이로 관직에서 물러나 같은 해 함길도로 선왕의 능침(陵寢)을 순시하러 갔다가 도중에 병을 얻어 사망한다.

‘의심 많은 왕’ 태종의 칼이 하륜만은 피해간 이유

그렇다면 창업기의 다른 설계자형 재상들과는 달리 하륜은 어떻게 의심 많은 군주의 비호를 받으면서 무사히 생을 마감할 수 있었을까?


우선, 하륜은 부를 탐한다는 평을 받았다. 국유지가 민간에 풀리자 사위들을 보내 선점했고, 무단으로 백성들을 동원해 간척 사업을 실시, 그 땅을 자신의 것으로 사유화해버리기도 했다. 뇌물을 받는 일도 매우 많았다. 이것은 도덕적으로는 비난받을 일이지만 처세에 있어서는 효과를 가져다주기도 한다. 일례로 한나라에서 백성들이 건국 재상 소하(蕭何)를 의지하며 민심이 소하를 향하자, 한 고조 유방은 소하가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에 소하는 ‘헐값으로 백성들의 땅을 강제로 빼앗아 스스로의 명성을 더럽히라’는 참모의 조언을 받아들였고, 유방은 소하에 대한 의심을 풀었다고 한다.

출처: 채널A '천일야사'

물론 하륜의 탐욕이 소하와 같은 고도의 계산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재물에 대한 욕심이 많아서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결과적으로 보면 하륜은 이러한 이미지를 통해 태종의 의심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재물에만 신경 쓰고 탐욕으로 인해 백성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재상이 왕권을 위협할 걱정은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하륜은 후계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신하였다. 아무리 충성스러운 신하라도 임금의 사후에 다음 대의 왕에게까지 변함없는 충성을 바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만일 후계자가 신하가 가진 탁월한 능력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왕권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더욱이 ‘선왕의 신하’는 기본적으로 후계자에게 부담스러운 존재다. 나이나 경륜이 한참 위일 뿐만 아니라 선왕의 결정과 법도가 임금이 따라야 할 가장 중요한 규범으로 작동하는 시스템 속에서 이를 함께한 선왕의 신하는 얼마든지 왕권을 제약할 수 있는 논리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래서 군주들은 왕위를 물려주기 전에 자신의 신하들이 후계자에게도 충성을 바칠 수 있도록 '윤리적 의무감'이라는 기제를 설정한다. 임금으로부터 뒷일을 부탁받는 ‘고명(顧命)’이 대표적이다. 또는 자신의 신하들이 후계자의 은혜를 입도록 함으로써 이들을 통제할 수 있는 명분을 새 임금에게 쥐여주는 경우도 있다. 태종이 황희를 귀양 보냈다가 세종으로 하여금 다시 등용하게 함으로써 황희가 세종의 성은을 입게 한 것이 그 예다. 후계자가 감당할 수 없거나 후계자에게 부담을 줄 만한 신하들에 대해서는 차제에 제거해버리곤 한다. 태종이 처남들과 핵심 측근인 이숙번을 숙청시킨 것처럼 말이다.


이때 하륜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하륜의 나이가 태종보다 스무 살이나 많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륜이 먼저 죽을 확률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설령 오래 살더라도 연로해 힘을 발휘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후대 임금에게 하륜이 미칠 영향에 대해서 경계할 필요가 없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심경/심학도

마지막으로 하륜은 군주인 태종이 가장 절실하게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하륜은 군주 중심의 통치체제를 확립하고자 했다. 이는 태종의 뜻과 일치한다. 그는 재상의 역할에 있어서 ‘보좌(補佐)’와 ‘자문(諮問)’에 강조점을 뒀다.


문무재상들의 합좌기구인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 혁파, 육조직계제(六曹職階制) 실시 등 그가 추진한 군주 중심의 중앙집권적 정책들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왔다. 육조직계제를 실시한 것은 재상이 군주를 보필하고 자문하는 데 힘써야지 자질구레한 서무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명분이었지만 육조를 군주가 직접 관장함으로써 재상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하륜이 군주의 학문인 ‘심학(心學)’을 강조한 것, ‘좌주문생제’를 혁파하고 ‘중시법(重試制)’을 실시한 것도 이와 관련 있다. 좌주문생제의 혁파는 좌주-문생 간의 사적 네트워크가 정치적 당파로 확대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모든 과거 합격자는 좌주가 아닌 군왕과 국가에 성심을 다하고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인식이 담겨 있다. 중시법은 하륜이 처음 고안해 시행한 것인데 종3품 이하의 관원들을 대상으로 한 일종의 학업능력 평가시험이다. 표면적으로는 학문을 장려하고 문풍을 진작시키려는 목적이었지만 왕이 직접 고열(考閱)해 그 순위를 정하게 함으로써 신하들에 대한 군왕의 지배권 강화에도 기여했다.


이처럼 군주 중심의 통치체제를 확립하고 그것의 이론적·제도적 틀을 완성시켜 준 하륜은 절대왕권을 꿈꿨던 태종에게 매우 고마운 존재였을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나서서 주도해줬을 뿐 아니라 견고하고 세밀한 시스템까지 구축해줬으니 말이다.

1인자의 힘을 유용하게 활용하는 2인자가 되려면

하륜은 자신과 주군 태종과의 관계를 효과적으로 관리했다. 군주의 눈치를 보고 아첨했다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자신과 임금, 국가 모두를 위한 최선의 결과를 얻기 위해 의식적으로 관계를 관리한 것으로 생각된다. 일반적으로 어떤 일을 잘 수행하려면 상사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1인자를 상사로 두고 있는 2인자는 더더욱 그렇다. 상사를 어떻게 관리하고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1인자가 가진 권위와 막강한 힘을 유용하게 활용해 가며 큰 성과를 이뤄낼 수가 있다.

출처: 네이버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스틸컷

그렇다면 상사를 잘 관리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하륜이 보여준 바와 같이 무엇보다 상사의 특성과 업무 스타일, 욕구를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과 상사 모두가 윈윈할 수 있는 협력 방식을 구축할 수 있다. 하륜은 의심이 많은 상사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 스스로의 힘을 약화시켰다. 또, 의견을 제시할 때는 단독으로 은밀히 진언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것은 공식적인 회의보다는 개인적인 통로를 통해 정보가 전달되는 것을 선호한 태종의 스타일에 맞춘 것이다.


하륜이 아첨만 하는 신하고, 태종은 신하의 충언은 듣지 않는 독단적인 군주여서 그런 것은 아니다. 하륜도 태종의 의견에 강하게 반대하고 직언을 해서 태종의 입장을 바꾸게 한 경우가 많았다. 다만 공개적인 자리를 택하지 않았을 뿐이다. 신하들의 목소리에는 귀를 기울였지만 동시에 군주의 권위를 매우 중시했던 태종의 성향상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의견을 제시해 입장을 바꾸도록 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또한, 하륜은 상사인 태종이 가졌던 목표와 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추진한 정책과 각종 기획들을 그 목표의 대전제 아래에서 추진함으로써 태종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이끌어내게 된다. 이처럼 하륜은 1인자이자 상사인 태종과의 관계를 잘 관리함으로써 자신의 생존뿐 아니라 정치적 영향력까지 변함없이 유지하며 자신이 계획했던 일들도 현실 속에서 구현해낼 수 있었다.


출처 프리미엄 경영 매거진 DBR 152호

필자 김준태 성균관대 동양철학문화연구소 연구원

인터비즈 김아현 박은애 정리
inter-biz@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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