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왜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을까?

조회수 2019. 12. 14. 11: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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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왜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을까?

[DBR/동아비즈니스리뷰] 일본만큼 변화에 대한 준비가 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19세기 후반은 서세동점(西勢東漸·서양의 열강들이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국제정세)의 시기다. 전 근대국가에서 근대 국가로 변화해야 하는 과제를 모든 국가가 갖고 있었다. 결과는 어땠을까? 일본이 압도적 우등생이었다. 중국은 열등생, 조선은 낙제생이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었을까? DBR 274호에 소개된 내용을 요약한다. 

출처: 나무위키
메이지 천황의 도쿄 행행 (르몽드 일러스트, 1869년 2월 20일)

일본이 성공적인 근대 국가를 만들 수 있었던 건 메이지유신에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와 비슷하게 서양 문물을 수용하려 했던 운동은 한국에도 있었고, 중국에도 있었다. 한국에는 김옥균이 주도한 갑신정변이 있었고, 중국에는 양무운동이 있었다. 한국과 중국의 운동은 실패하고 메이지유신은 성공한 이유는 무엇일까? 일본이 오래전부터 변화에 대한 준비를 해왔기 때문이다. 메이지유신이 결정적 역할을 한 건 사실이지만 그 이전 시대(에도시대)부터 차츰 발전해 왔기 때문에 변화가 가능했다. 도대체 에도시대 일본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몇 가지 측면을 살펴본다.

오래 전부터 인프라에 많은 투자를 해왔다

에도는 18세기 중반 인구 100만 명이 거주하는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 어떻게 이런 도시를 만들 수 있었을까? 도쿠가와 이에야스 덕분이다. 이에야스의 목표는 두 가지였다. 1) 에도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것과 2) 다이묘의 세력을 견제하는 것이다. 이를 위한 두 가지 제도가 천하보청과 참근교대제였다. 둘 다 다이묘의 등골을 빼는 것이 목적인데 이게 예기치 않게 일본을 발전시켰다.


우선, 천하보청이다. 이는 쇼군이 다이묘들에게 부과하는 공공사업 역무를 말한다. 쇼군과 다이묘는 주종관계가 아니었다. 쇼군은 다이묘에게 세금을 징수할 수 없었다. 이에 세금을 대신하여 인프라의 책임을 다이묘들에게 부과했다. 성곽 축성, 제방과 도로 건설 등 관련 공사에 다이묘가 인력과 자재를 제공하도록 의무를 부가한 것이다. 에도의 히비야 매립 사업, 에도성 축성, 고카이도 정비 등은 천하보청의 결과물이다.


천하보청은 기존 세금징수의 비효율을 제거했다. 세금을 거두면 그 과정에서 많은 비효율이 발생한다. 왜곡된 자본의 축적과 잉여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금 징수가 아닌 결과물 형태로 의무를 부과하자 관리비용 등 매몰비용이나 착복으로 인한 증발 없이 모든 투입이 실물 인프라로 이어졌다. 중앙에 징세권이 없다는 것이 천하보청과 맞물려 예기치 못한 결과를 낳은 것이다.

소노베 번 산킨코타이 행렬도(1)
소노베 번 산킨코타이 행렬도(2)
소노베 번 산킨코타이 행렬도(3)

다음은 참근교대제다. 참근교대제는 1년 단위로 각 번의 번주를 정기적으로 에도에서 머물게 하는 일종의 인질제도다. 그런데 이 제도는 예상치 못한 효과를 낳았다. 먼저, 경제적 파급 효과였다. 참근교대에는 막대한 비용이 소요된다. 적게는 100명에서 많게는 500명 이상의 대규모 인원이 수백㎞가 넘는 거리를 이동하는 데 소요되는 비용을 전적으로 다이묘가 부담해야 했다. 독자 징세권에 따라 치러야 하는 대가였다.


하루라도 약정된 날보다 늦게 도착하면 막부의 질책과 막대한 비용 출혈이 발생하기 때문에 각 번은 사전에 선발대를 파견해 치밀하게 일정을 짰다. 한편 도로 사정이 열악하면 스스로 비용을 부담해 도로를 개보수하는 등 심리적·경제적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동할 때 오늘날 화폐 단위를 기준으로 수행원 1인당 식비와 숙박비로 하루 6000엔 정도를 상정할 경우 평균 3억∼4억 엔 정도의 경비가 편도 이동에 소요됐다. 이런 다이묘가 전국에 270여 가문이나 산재해 있었으니 지금 돈으로 매년 수조 원이 길거리에 뿌려진 셈이다.


중앙과 지방의 최고 엘리트 집단이 에도라는 한 도시에 거주하게 됨으로써 발생하는 사회경제적 효과는 실로 엄청났다. 수십만 명의 다이묘와 수행원들이 소비자로 유입되면서 에도에는 거대한 소비 시장이 형성됐다. 이들의 저택과 수행원 숙소, 공공 인프라 마련을 위한 토목·건설·건축업은 물론 다이묘 일행의 생활을 위한 외식업, 공예업, 운수업, 복식 문화에 따른 섬유업과 의상업, 문화생활을 위한 출판업, 공연업과 향락산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상업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기초 교육을 실시했다

식자율(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회구성원의 비율)은 한 국가 또는 사회의 지적 수준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 중 하나다. 19세기 초반 일본 인구의 70∼80%가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편지로 서로 의사를 전달하는 습관은 영국보다 더 폭넓게 퍼져 있다. 일본인들은 우편의 재미에 푹 빠져 있기라도 하듯 서로 짧은 편지를 주고받기를 좋아한다.” 외국인 눈에 비친 일본인의 모습이었다. 어떻게 이게 가능했을까?

출처: 위키백과
에도 시대 후기에 미토 번에 만들어진 번교 '고도칸'

우선 공교육이다. 공교육의 핵심은 번교인데, 번교란 각 번의 무사 계급인 번사의 자제들을 위한 지배층의 핵심 교육 기관이다. 각 번은 고도의 자치권을 행사했다. 이에 각 번의 사정과 처지에 맞는 인재 육성이 가능했다. 각 번마다 필요한 지식과 요구되는 전문성이 달랐기 때문에 다양한 인재가 배출됐다.


번교 개혁의 대표적 사례가 사쓰마번의 조시칸이다. 사쓰마번은 지정학적으로 대륙 정세에 대한 정보 입수가 빠르고 서양 세력과의 접촉이 불가피한 곳이다. 그러다 보니 기존 유교와 무예 중심의 전통교육에서 탈피해 신시대에 맞는 곳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선박을 위한 교육, 과학기술을 위한 교육, 중국어 연구를 위한 교육, 서양식 병기와 군학을 위한 연구 등이 이루어졌다. 1865년 사쓰마번은 영국에 3명의 사절단과 15명의 유학생을 보내기도 했다.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네덜란드, 벨기에 등을 순방하고 일부는 미국까지 갔다.

서민 교육은 데라코야라는 사설 교육기관에서 이뤄졌다. 이 기관은 실용적이고 수요자 중심이었다. 글을 읽고, 쓰고, 주판을 할 줄 아는 서민 양성에 초점을 뒀다. 오라이모노(작문의 초급 교과서)를 읽고 습자를 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작문 능력이 향상됐다.


신지식인을 양성한 주쿠라는 교육기관도 있었다. 대표적인 주쿠가 바로 쇼카손주쿠다. 이 조슈번의 작은 주쿠에서 지도를 받았던 학생들은 막부 타도의 선봉에 서서 메이지유신을 주도했다. 난학(蘭學) 전문 주쿠, 의학 전문 주쿠 등이 있었고 나가사키 근교의 나루타키주쿠는 서양 의학과 식물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데키주큐의 문하생들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1858년 자신의 교육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게이오기주쿠를 설립했고, 이게 오늘날 게이오대학으로 발전했다.


에도시대 교육의 특징은 지배계층만을 대상으로 하는 공교육이 아니라 서민을 대상으로 하는 사교육이 발달했다는 것이다. 서민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사회의 건전한 유지와 발전을 위해 익혀야 할 지식과 교양이 필요하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됐다. 이에 따라 일상생활에 필요한 실용 교육, 직업 생활에 필요한 봉공 교육, 공동생활에 필요한 도덕 교육 등이 서민 교육의 중심 내용으로 강조됐다. 물론 신분제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한계는 있으나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기초 교육이 필요하다는 인식은 전근대사회에서 앞선 교육관이었다.

출판 문화가 급격히 성장했다

16세기까지 일본의 출판 문화는 유럽, 중국은 물론 조선에 비해서도 뒤처져 있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상황은 역전됐다. 일본의 출판 문화가 엄청나게 성장한 것. 17세기 중반 200여 개의 출판업자가 경쟁하고, 18세기 중반이 되면 연간 1000여 종의 신간이 쏟아져 나오며, 19세기에 접어들면서는 모든 국민이 책을 필수품으로 활용하는 출판 대국이 된다. 이미 에도시대부터 책이 보편화되고, 대부분의 일본인이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

출처: 일본 국립 국회 도서관 소장
1682년 발간된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鶴)의 《호색일대남(好色一代男)》이라는 포르노그래피 소설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호색일대남》의 인기를 계기로 출판 문화가 급격히 성장하기 시작했다.

판권, 대여업에 비결이 있었다. 책을 찍어낼 수 있는 판목이 출판업자의 생명 같은 주요 재산이 되었다. 판목의 소유 및 이용 권리 규범으로 판권이란 개념이 만들어졌다. 소유 양도가 가능한 재산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주식처럼 소유권을 분할하는 것도 가능해졌고, 배타적 소유권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쇼시라고 출판사, 인쇄소, 서점의 일관 공급 체계를 갖춘 출판 프로듀서가 출판 생태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출판은 작가가 기요즈리라는 원고를 작성하면 판각 전문가인 호리시, 인쇄 전문가 스리 등 직인이 분업과 전문화의 원리에 따라 제판, 인쇄, 제본을 했다. 상당한 초기 투자가 필요했다.


그러다 보니 렌털 비즈니스도 나왔다. 18세기 중반 200개가 넘는 대본소(돈을 받고 책을 빌려주는 곳)가 성업했다. 대본소마다 200군데 넘는 단골 거래소가 있었고, 인기 드라마처럼 독서 열풍이 전국을 휘감았다. 기존에 딱딱하고 재미없던 책이 엔터테인먼트 상품이 됐다.18세기 말 인구 100만의 에도에 출판업자들이 모여 연간 수백 종의 신간을 발행하는 본격적인 상업 출판시대가 꽃을 피웠다. 에도의 출판 시장에서는 각종 오락물, 실용서, 여행 가이드북 등 다양한 장르가 개척됐고, 출판사의 의뢰를 받아 전문적인 취재를 하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전업 작가가 출현하는 등 현대 출판 시장을 방불케 하는 비즈니스 생태계가 구축됐다.

해외서 도자기 문화를 꽃 피웠다

일본은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으로 부른다. 조선에서 도공을 데려왔기 때문이다. 도자기에 관해서는 조선이 원조이고, 일본은 짝퉁이다. 하지만 도자기를 상업화해 글로벌 상품으로 만든 건 일본이다. 이들은 일찌감치 해외 박람회에 자신들이 만든 도자기를 전시해 외국의 고객을 확보했다.

당시 만국박람회는 요즘 위상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엄청난 국제 행사였다. ‘교육과 문화’를 주제로 개최된 빈 박람회에는 수백만 명의 유럽인 관람객이 다녀갔고, 아리타야키를 비롯한 일본의 회화·공예품은 관람객들의 뇌리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박람회 내내 화제를 불러 모았던 만큼 아리타야키는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뒀다. 참가단이 준비해 간 찻잔, 접시 등의 소품들이 현장에서 불티나게 팔렸고, 일본 국내에 추가 주문이 쇄도했다. 1872년 4만5000엔이었던 일본의 도자기 수출액은 빈 박람회가 개최된 1873년에는 11만6000엔으로 2.5배 이상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빈 박람회에 출품된 아리타야키는 일본의 도자기 수출 전체를 견인하는 위력을 발휘했다.


8·15 광복절을 맞이할 때마다 우리 언론은 일제의 잔악한 침략과 수탈에 초점을 맞춘다. '왜 나라를 빼앗겼을까?' '우리는 어떤 문제를 갖고 있었을까?' '지금처럼 살면 불행한 역사를 반복하지는 않을까?' 이런 반성의 목소리는 별로 들리지 않는다.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일본을 이겼는가?


발전의 결과물 중 하나인 노벨상 수상 건수를 살펴보자. 한국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받은 평화상 하나뿐이다. 다른 분야는 하나도 없고, 앞으로도 나올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일본은 2017년 현재 무려 25개에 달한다. 일본인 이름이 수상 명부에 오르지 않은 적이 한 해도 없다. 경제 규모나 다른 지표는 볼 것도 없이 게임이 인 된다. 지금도 일본은 압도적 우등생이고, 우리는 예전보다 나아졌지만 아직 열등생 수준이다.


문제는 한국이 이런 일본을 우습게 안다는 것이다. 과연 일본이 우습게 알아도 되는 나라이고, 그 근거는 있는가? 나는 이 같은 물음에 대해 회의적이다. 전 세계에서 일본을 우습게 보는 유일한 나라는 한국이다. 도대체 왜 우습게 보는 것일까?


역사에서 배우지 못한 자는 불운한 역사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강하면 살아남고, 약하면 짓밟힌다. 우리는 힘을 기르지 못해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역사를 갖고 있다. 지금은 어떤가? 지금 충분한 힘을 갖고 있는가? 지금 일본이 다시 쳐들어온다면 이를 막을 수 있는가? 안전하게 국민들을 보호할 수 있는가?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힘도 없으면서 큰소리치고 대항하려는 사람이다. 그 끝은 얻어터지는 것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일까? 힘없을 때 조용히 힘을 기르는 것이다.

출처 프리미엄 경영 매거진 DBR 274호

필자 한근태 한스컨설팅 대표

인터비즈 이슬지, 임현석 정리
inter-biz@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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