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원하는날 차 반파사고, 한쪽 팔 못쓴다고 하더라고요

조회수 2020. 9. 24. 11:3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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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프의, 셰프에 의한, 셰프를 위한 조리복 입니다"
워크웨어 스타트업 븟(beut) 배건웅 대표
수능 전날 부친 사망, 임신한 아내와 교통사고
죽을 고비 넘겼지만 오른팔 마비로 조리사 포기
깔맞춤 ‘조리복’으로 연 매출 8억 기업 일궈

‘븟(beut).’


생소하게 들릴지 몰라도 부엌 그리고 주방을 뜻하는 우리말이다. 우리말을 앞세워 한국인 체형에 맞는 조리복을 만드는 스타트업 이름이기도 하다. 요리사에게 딱 맞는 옷을 만드는 븟은 전직 셰프였던 배건웅(37) 대표가 이끌고 있다. 쉽게 구김이 가지 않고 통풍이 잘되는 조리복으로 셰프가 주방에서 편하게 요리할 수 있는 옷을 만들어 2만장 넘게 팔았다. 이연복, 최현석 등 유명 셰프도 입고 연 매출 8억원을 올린다. 배 대표는 조리복뿐 아니라 요리사의 더 나은 근로 환경과 식문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배건웅 대표에게 서울 압구정 사무실에서 한때 요리사를 꿈꾸다 조리복을 만들게 된 이야기를 들었다.

출처: 븟 제공
븟 배건웅 대표

◇전자레인지로 시작된 요리사의 꿈


배건웅 대표가 요리에 처음 관심을 둔 건 아버지가 사 온 전자레인지에 요리를 해 먹었던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요리 책자를 보고 따라 한 음식을 가족이 맛있게 먹는 것을 보고 요리에 매력을 느꼈다. 인문계 고등학교가 아닌 공업고등학교를 가서 요리를 더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배 대표의 마음을 읽은 이모와 함께 부모님을 설득해 공업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 오래 아프셨기 때문에 방과 후 뷔페, 식당, 패스트푸드 점 가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일하지 않는 날엔 요리학원에 갔습니다. 그러다 수능 전날 투병 중이던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셨어요. 수능과 장례식을 한 번에 치르고 저도 온 몸에 열이 나고 임파선이 부어 병원을 찾았어요. 임파선을 떼어내고 나서 이게 기쿠치병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희귀병으로 임파선이 붓는 림프절염이에요. 항생제만 먹어도 됐는데 잘 알지 못해 임파선을 떼어낸 거죠. 병도 호전되고 2년제 전문대 호텔조리학과에 진학했습니다."


매일 알바를 하면서도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에 다녔다. 졸업 후 미국 유명 호텔 모히건 썬 인턴 모집 공고를 봤다. 당시 배 대표는 25살인데 ‘Be동사’도 몰랐다고 한다. 한 달 동안 회화 수업을 들으면서 할 말을 A4용지 10여장에 정리해 통째로 외웠다. 면접 때는 물론 외운 것을 모두 말하고 싶어 실습 시험에서도 면접관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결국 1등으로 합격해 이탈리안 요리로 유명한 셰프 토드 잉글리시(William Todd English)가 있는 이탈리아 레스토랑 '투스카니'에서 일을 시작했다.

출처: 븟 제공
이연복 셰프가 븟 조리복을 입은 모습(좌), 수미네 반찬에서 븟 조리복을 입은 셰프들(우)

◇죽을 고비 넘겼지만 요리할 수 없게 돼


1년이 지나고 더 일하고 싶었지만 병이 재발해 어쩔 수 없이 한국에 돌아왔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경희 사이버 대학에 진학해 공부했다. 공부를 하다보니 진로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이 길이 맞는건지', '평생 요리를 하며 살 수 있을지'와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결국 요리사가 천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죽을 때도 주방에서 죽어도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고 이탈리아 유학을 결정했다.


"이탈리아 요리를 하는 요리사로서 진짜 이탈리아는 어떨지 궁금했어요. 낮에는 이탈리아어를 공부했고 밤에는 일하면서 유학을 준비했어요. 29살에 이탈리아 유명 요리학교 알마로 떠나 다시 공부를 시작했죠. 기술적인 것은 물론이고 요리 철학, 문화를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졌습니다. 슬로 푸드가 시작된 곳이 이탈리아입니다. 전통 음식, 요리의 가치 등을 배울 수 있었어요. 그때 배운 것이 지금의 저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졸업 후 현지 한 레스토랑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받았는데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고 자리 잡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결혼 후 국내 한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일하면서 지냈다. 2013년 배 대표의 인생을 바꾸는 사고가 연달아 터졌다.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빗장뼈가 부러졌고 수술을 받고 퇴원하는 날 교통사고를 당했다. 다른 차가 그와 임신한 아내가 탄 차를 받은 것이다. 차가 반파될 정도로 큰 사고였다. 다행히 아내와 배 속의 아이는 무사했다. 배 대표도 목숨에 지장은 없었지만 요리사에게 생명인 오른팔을 쓸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제게 요리는 가장 행복한 취미이자 일이었어요. 주 7일을 일하든 돈을 얼마 받든 상관이 없었죠. 요리를 다시 못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제 세상은 무너졌습니다."

출처: 네이버tv 캡처
한 요리 프로그램에 셰프로 출연한 모습

◇요리사 꿈 잃었지만 새로운 목표 찾아


재활을 통해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요리는 할 수 없었다. 생선 비늘을 벗길 수조차 없었다. 사고 이후로 우울하지 않은 날이 없었지만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책임져야할 가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고 전 친구와 함께 조리복을 만들어야겠다고 사업자등록을 했습니다. 일하던 레스토랑 월급이 정말 적었습니다. 주방에서 11명이 일하는데 총 월급 예산이 1700만원이었어요. 조리복도 직접 동료들이 돈을 모아서 외국 브랜드로 사입었어요. 외국 브랜드다보니 몸통은 맞는데 팔은 길고 꽉 꼈죠. 한국인 체형에 맞지 않았어요. 이런 환경을 개선해보고 싶어서 사업자를 냈습니다. 오랜 친구이자 김준하 이사와 함께 시작했어요."


독학은 물론 디자인업에 종사하는 지인을 찾아가 물어보고 배웠다. 디자인은 처음이라 무시도 당하고 실패도 맛봤다. 시제품을 만들면서 돈도 많이 썼다. 2013년 하반기 첫 제품을 완성해 판매를 시작했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그러다 2014년 1월 이태원에 10평 남짓한 사무실을 열면서 요리사 근로환경 개선, 인문학 공부 등을 위한 비영리 단체 '븟 요리사 커뮤니티'를 함께 시작했다. 브랜드 오픈 소식을 SNS에 알리면서 븟과 커뮤니티가 입소문을 탔다. 오픈 파티 때는 100여명의 요리사들이 사무실에 몰렸다.


븟 제품을 접한 셰프 사이에서 요리사를 위한 조리복이라고 입소문이 퍼졌다. 배 대표가 요리사로서 느꼈던 것들을 조리복에 적용했기 때문이다. 기존 조리복 원단보다 3배 이상 비싼 원단을 사용한다. 땀이 높고 두껍지만 가볍다. 다림질을 하지 않아도 구겨지지 않는다. 등쪽에 공기가 통하도록 그물 형태 원단을 조리복에 최초로 사용했다. 더운 주방에서 일하는 요리사를 생각한 디자인이다. 그래서 가격은 비싸지만 재구매율이 높았다. ‘한번도 안 입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입어본 사람은 없다’고 평가했다.

출처: 븟 제공
븟을 함께 만드는 식구들

◇요리계의 마당발, 목표는 ‘조리복으로 우주정복’


배건웅 대표의 또 다른 별명은 ‘요리계의 프로 오지라퍼(오지랖이 넓은 사람)’다. 그가 븟 요리사 커뮤니티를 운영하는 이유기도 하다. 이곳에서는 외식업 관련 인문사회학, 철학, 역사 등 강의를 하고 식재료에 대해 공부한다. 음식 산업화, 지속가능성, 생존 등에 대한 이야기도 나눈다. 이탈리아에서 느낀 제대로 된 식문화가 한국에도 자리 잡았으면 좋겠는 마음에서다.


“요리는 식재료에서부터 그 가치가 시작됩니다. 식재료가 어디서 어떻게 주방으로 전달되고 어떤 과정을 통해 식탁에 오르는지가 하나의 문화죠. 이 가치를 이해한다면 음식을 가치 있고 즐겁게 소비할 수 있습니다. 한국은 트렌드가 강한 나라 중 하나입니다. 자신이 먹고 싶은 것보다 유행하는 음식, 맛집 등을 찾아가요. 그러다 보면 소비자는 물론 제공자도 획일적일 수밖에 없어요. 올바른 식문화가 자리 잡을 수 있게 요리사가 먼저 공부하자는 생각에서 시작했습니다.”


외식업 관련 지역 행사 기획, 메뉴 컨설팅 등은 물론 구인·구직 플랫폼 역할도 한다. 예를 들면 지역 행사에서 먹거리를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지 문의가 들어오면 주제와 지역을 잘 아는 셰프를 연결해준다. 혹은 직업을 소개하기도 하고 기획 단계부터 참여하기도 한다. SK행복나눔재단에서 실시하는 1년 외식산업 무료 직업 교육 프로그램 ‘SK뉴스쿨’에도 참여하고 있다. 모든 활동은 수익 목적이 아니라 스스로가 좋아서 하는 일이다. 한때 요리로 우주정복 하는 것이 꿈이었던 그는 이제 요리가 아닌 조리복으로 우주정복을 꿈꾼다.


“요리사를 꿈꾸고 팔이 멀쩡할 땐 요리로 우주정복을 꿈꿨습니다. 지금은 조리복으로 우주정복을 꿈꿉니다. 지금은 조리복에 집중하고 있지만 다양한 워크웨어를 만드는 스타트업으로 거듭나고 싶습니다. 어떤 직업이든 우리가 만드는 작업복을 통해 ‘나를 정말 소중하게 생각해주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곳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글 jobsN 이승아
jobarajob@naver.com
잡스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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