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한 '계획된 진부화'가 필요한 시대

조회수 2020. 8. 17. 19:2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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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소한 단어가 생긴 역사와 자동차 산업에 준 영향
출처: PickPik
제품에 관한 사회운동을 일으킨 애플 아이폰

2017년 12월 20일. 애플은 자사의 아이폰 6S가 갑자기 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성능을 제한한다고 발표했다. 이후 미국과 이스라엘 등 여러 나라에서 이와 관련된 민사 소송이 시작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아이폰이나 전자제품을 사면 ‘2년 후 급격히 성능이 저하된다’라는 괴담이 사실이냐며 온라인이 들썩거렸다.

프랑스의 한 소비자 단체는 애플이 '계획된 진부화 방지법'을 위반했다며 형사 소송을 제기하는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줬다. 이것은 프랑스 정부가 처음으로 2015년 계획된 진부화 방지법이란 규제를 마련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계획된 진부화’라는 이 생소한 단어가 생긴 역사와 자동차 산업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계획된 진부화(planned obsolescence)라는 개념을 만들어 자동차에 관련된 마케팅과 디자인 그리고 사업 등에 지대한 영향을 준 인물이 바로 알프레드 P. 슬론(Alfred P. Sloan)이었다. 그는 방만한 경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볼 베어링 회사를 인수해 성장시킨 경영의 천재였다. 사업에 대한 슬론의 감각과 열정을 알아본 제너럴 모터스(GM)의 설립자 윌리엄 듀런트는 그를 신뢰했고 GM의 임원에 오르는 데 큰 힘이 되어주었다고 한다. 슬론은 GM 부사장을 거쳐 최고경영자가 됐고 1937년에 회장에 오르기까지 한 입지전적 인물로 평가되었다. 

출처: Wikimedia
알프레드 슬론

‘이윤 추구가 기업의 최대 덕목’이라는 경영철학을 바탕으로, 고객이 매년 새로운 자동차를 구매하게 만드는 자동차 설계 변경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슬론이 만들어낸 전략이 바로 계획된 진부화였다. 이 전략을 통해 GM은 쉐보레, 폰티액, 올즈모빌, 뷰익, 캐딜락 등 각 브랜드의 이미지를 확장해 서민층부터 부유층에 이르기까지 가장 적절한 브랜드 소비 전략을 확립했다. 

출처: Wikimedia
계획된 진부화 개념을 대표하는 테일핀 디자인

그 덕분에 GM은 1930년대부터 포드를 누르고 미국 빅 3을 선도해나갈 수 있었다. 반면 GM의 성공적 생산 전략과 마케팅을 따라갈 수 없었던 소규모 자동차 제조업체는 하나둘 도산할 수밖에 없었다. 


혁신적 최신 기술로 내구성만 높은 자동차 모델이 즉각 수입되지 않는다는 것을 자동차 업체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업체들은 슬론이 제창한 계획된 진부화 개념을 오랫동안 적용, 발전시킬 수밖에 없었다. 


GM의 성장을 닮고 싶은 자동차 업체가 새로운 소비를 창출하기 위해 만들었던 전략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로 지속적인 스타일 변경을 추구했다. 어느 사업이나 마찬가지 듯, 제조사는 소비자의 구매 욕구를 높여야 한다. 이를 위해 최근에는 방송 매체나 유튜브 그리고 소셜 미디어 등을 통해 소비자에게 양산할 모델이 기존 모델보다 대비해 향상된 기능과 스타일 등을 지속해서 알린다. 신비주의적으로 실루엣만 보여주는 광고도 그 한 예다. 

출처: Walhere
GMC의 신구모델과 다른 차종을 한눈에 비교할 수 있는 1950년대 광고

양산 후 짧으면 몇 개월이나 일여 년 만에 같은 모델을 재설계해 차체 디자인과 인테리어를 더 매력 있게 만들고 더욱 향상된 안전장치와 엔진을 적용한다. 이런 일들은 제조사가 과거에 생산된 자동차는 요즘의 유행이 아니라고 강조하는 듯한 부정적 인상을 소비자에게 주기도 했다. 


두 번째로 예비 부품을 적게 생산하는 것이었다. 1990년대 중반에는 교통사고 등 여러 문제로 오래된 차를 수리해야 할 상황에서 예비 부품을 구할 수 없는 경우가 생겼다. 제조사가 새로운 모델의 예비 부품을 넉넉하게 공급하는 것과 대조적이었다. 예비 부품을 만들어 쌓아둘 창고도 부족했고 공급업체 또한 부족했던 시대로 기억하고 있다. 

출처: Jalopyjournal
자동차 부품이 턱없이 부족한 1950년대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애프터마켓

심지어 지방 한적한 동네에서 사고를 당하면 정비소에 힘들게 찾아가도 부품이 없어 하루 정도 기다려야 해 곧바로 수리할 수 없었다. 지금처럼 보험사나 정비업소의 네트워크가 활성화되기 전의 일이다. 주변에는 그런 이유로 부품을 기다리다가 새 차를 사는 사람도 있었다. 다행히 2010년 2월에 우리나라에서도 ‘동일한 형식의 자동차를 최종 판매한 날부터 8년 이상 정비에 필요한 부품을 공급하여야 한다’는 자동차관리법 시행규칙이 신설되며 예비 부품 부족에 따른 불편은 많이 줄었다. 

출처: industrybuying
자동차 예비부품 시장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 중이다

그러나 국내 부품 공급이 아무리 원활해도 최근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인해 바다를 건너 국내로 들어오는 부품들을 수급하지 못해 수리하지 못하는 차량이 속출하고 있는 뉴스를 보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소비자에게 새로운 제품을 홍보하고 구매를 독려하는 자동차 메이커의 마케팅이 필요악이라는 생각도 든다.  


도입부에 언급한 프랑스의 계획된 진부화 방지법은 자동차가 아니라 스타킹에서 비롯되었다. 스타킹은 다른 섬유보다 마찰에 강하고 높은 강도를 가진 나일론이 주재료지만, 올이 너무나 쉽게 손상되어 매번 새 제품을 사야 하는 불편함을 호소한 소비자의 목소리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런 활동으로 인해 부분 수리를 하지 않았던 애플의 리퍼비시 정책이 수정되었고 자동차 업계의 품질 보증 제도도 작으나마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출처: Biggerbids
아이폰 리퍼 정책을 바꿀 수 있었던 것도 사회 운동의 힘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와 같은 사회적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 자동차 화재, 누수, 테슬라 오토파일럿 기능의 베타 버전 문제 등 여러 사건의 원인을 소비자가 밝혀내야 한다는 데 불만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사고의 원인 제공자가 운전자일 수도 있다. 스타킹을 신고 벗다가 끊어진 올처럼 말이다. 엉망진창으로 만든 제품을 파는 제조사는 아마 단 한 곳도 없을 것이다. 

출처: freepik
인적이 드문 곳에서의 차량 고장은 보험 차량도 참 오래 기다리게 한다

그러나 제품에서 예기치 못한 고장이 발생한다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계획된 진부화 개념으로 만들어진 새 모델에 대한 신뢰가 생기고 충성도 또한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자동차 제조사는 프랑스의 계획된 진부화 방지법의 실행 취지를 이해하고 더 훌륭한 내구성과 정비성 그리고 안전한 기술을 담은 자동차를 생산했으면 한다. 필자뿐 아니라 수많은 소비자 모두가 그러기를 원할 것이다.

글 윤영준 (자동차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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