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요구가 낳은 차, 기아 봉고

조회수 2021. 2. 15. 08: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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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달차, 승합차, 상용 밴으로 이어지며 원형과 다른 길을 걸은 상용차

1977년에 '자가용족'이라는 신조어가 생기기 전까지, 서울은 택시의 전성시대를 누렸다. 버스와 기본요금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으며 정류장에서 기다리지 않아도 손만 흔들면 태워주는 택시가 훨씬 편했다. 이렇게 택시를 이용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자립한 성인들이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맞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출처: 서울시 아카이브
1971년 2월 입시생을 위해 제공된 12대의 버스 중 하나

성인과 달리, 당시 대부분 학생의 발은 바로 버스였다. 실제로 1971년 2월 서울시는 고교 입시 응시자를 위해 학생을 위한 무상 버스를 제공하기도 했다. 지금도 학생을 포함한 시민들에게 버스는 고마운 대중교통수단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1974년 서울지하철 시승식

1974년에 처음 서울지하철이 개통했을 때도 주요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통근, 통학용 버스가 존재했다. 심지어 1980년 7월 신군부의 ‘과외 전면금지’ 선언에도 학생들을 태운 버스는 감시의 눈을 피해 거리를 달렸다. 이렇게 도시의 골목골목 파고든 버스의 존재 가치는 도시 인구 증가로 인해 더욱 빛이 났다. 우리나라는 빠른 산업화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트럭 또한 필요한 시대였다.  

1980년 잠실 수영장과 주변 아파트

당시에는 강남 일대의 개발과 아파트 건설 붐이 일어나며, 철근과 모래 등을 싣는 대형 트럭이 지방과 서울을 쉼 없이 오가고 있었다. 서울 변두리 지역에서는 모래 산이 쌓여 있는 광경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뿐 아니었다. 이삿짐을 가득 싣고 중소형 트럭도 함께 달리고 있었다. 그에 따라 도시로 유입되는 인구수가 증가했다. 

1979년 송파로 기공식

도시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면 리어카 등을 이용해 냉장고나 가재도구 같은 살림살이를 옮길 수 있었다. 하지만 농촌에서 도시로의 이동은 물리적으로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이삿짐을 옮길 용달차가 필요했지만, 버스처럼 중소형 트럭 또한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자동차공업 합리화로 인해 강요된 산업 변화

그때까지 기아는 1960년부터 일본 마쓰다의 전신 기업 동양공업과 혼다 등과 직간접적 관계를 맺으며 삼륜 픽업트럭과 승용차 그리고 모터사이클을 만들고 있었다. 1970년대 초반에는 브리사로 승용차 시장에 늦게 진입했지만, 시장 반응은 뜨거웠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브리사가 매장에 나온 뒤 1년이 되지 않은 짧은 기간에 1만 대 이상이 판매되었다. 이런 놀라운 기록에 경쟁사들은 자극을 받았는지 새로운 모델을 내놓았지만, 브리사의 독주를 막을 수 없었다. 

제2차 석유파동 당시 기아 브리사 광고

끝없이 가동될 줄만 알았던 기아의 생산라인은 제2차 석유파동으로 인해 브레이크가 걸렸다. 경기는 위축되고 소비는 줄어든 영향이었다. 이로 인해 1980년에 기아뿐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 자동차 생산량이 전년보다 40% 이상 급락했다. 이뿐 아니라 국내에서는 또 다른 파랑이 일었다. 

1980년에 제5공화국이 출범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81년 2월 28일 정부는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이하 2·28 조치)를 강행했다. 그것은 대한민국 자동차 산업 역사상 최악의 정부 정책으로 기록되기에 충분한 악법이었다. 그 당시 기아는 AM 시리즈 등 버스를 제작하고 있었지만, 관심의 눈은 딴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마이카 시대에 걸맞은 승용차를 중심으로 여러 트림의 모델을 제조하는 종합 자동차 메이커로 입지를 굳히려는 것이었다. 

출처: 경향신문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 관련 기사

2·28 조치 시행으로 기아는 승용차와 모터사이클 시장에서 완전히 퇴출당하여, 중소형 트럭과 버스만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로 인해 차세대 모델 등의 기술 개발과 인수합병 등 마케팅에 들어간 비용 등은 고스란히 적자가 되었다. 그 액수는 최소 530억 원 이상이었다고 한다. 기아는 정부의 이런 조치에 반대해 시위로 저항했지만, 군부가 공포한 악법은 개선되지 않았다. 기아는 살아남기 위해 산업화와 아파트 대량 건설 그리고 도시로의 인구 대이동의 시대에 고객이 원하는 적합한 자동차를 찾아내야만 했다. 

기아, 용달차의 대명사를 내놓다

수많은 논의 끝에 기아는 소형 트럭을 우선 내놓기로 했다. 이는 신군부에 의해 강제로 생산 중단되기까지 인기 차종이었던 현대 포터의 시장을 주목해서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위기를 기회로 변화시키려 노력한 기아는 마침내 1980년 8월 기아마스타 1톤 디젤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 차는 2,200cc 70마력의 강력하고 연비도 좋은 엔진이라는 안정적 파워트레인을 가지고 있었다. 여담이지만 '기름을 아낍시다'가 이 차의 광고 카피 중 하나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구형(口形) 단면 프레임과 전부동식 리어 액슬, 더블 타이어를 사용하고 튼튼한 차체와 뛰어난 제동력, 안락한 승차감이 특징이었다. 또한 국내 최초 저상식으로 디자인되어 화물의 상하차가 쉽다는 것은 소비자에게 큰 어필이 되었다. 한마디로 안정성과 편의성 등까지 고루 갖추고 있었던 모델이었다. 

1980년 기아마스타 1톤 디젤 광고

그러나 기아의 자체 기술로 만들어진 고유한 모델은 아니었다. 마쓰다의 밀리언셀러였던 봉고 2세대 트럭(BA2)의 영문 레터링을 제거한 것 이외에 다른 점을 찾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아쉬운 점은 마쓰다의 디젤 모델보다 문제가 적었던 가솔린 엔진 모델을 처음부터 가져오지 않아 단종될 때까지 잦은 엔진 고장으로 불만의 목소리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출처: Wikipedia
마쓰다 봉고 2세대(BA2) 디젤

그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중고 시세가 약 450만 원이었을 때 찾는 고객이 넘쳐나 30만 원 정도 웃돈을 주고 사야 할 정도로 엄청난 인기몰이를 했다. 비슷한 시기에 개포주공 1단지 56㎡ 아파트값이 1,000만 원대 초반이었으니 결코 저렴한 가격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사람들은 ‘용달차는 봉고’란 말이 만연할 정도로 시대가 요구했던 차였음을 방증하는 사실이다.

출처: 경향신문
1980년 10월 기아 봉고 광고

권외적인 이야기지만 기아는 이 차가 마쓰다의 봉고라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기아마스타 1톤 디젤 출시 2달 정도가 흐른 후 여러 광고를 통해 마쓰다 1톤 트럭의 이름인 봉고를 그대로 쓴 것을 알렸다. 그때부터 봉고가 소형 트럭 또는 용달차의 일반명사처럼 불리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상용 밴이 탄생할 수 밖에 없었던 시대

본론으로 돌아가, 기아는 이렇게 시장 점유율을 높이고 있던 소형트럭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기존 현대와 동아자동차 등이 장악하고 있던 대형버스의 틈새시장을 노려 미니버스의 도입을 준비했다. 도시와 농촌에 흔했던 좁고 구불구불한 길을 내달릴 수 있는 중소형 버스를 요구하는 시장이 분명히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그것은 '패밀리 카'의 대명사가 될 차였다.

1970년대 후반 마이카 열풍에 자가용을 구매하는 사람들이 늘었지만, 이후 오일쇼크와 자가용 소유자에 대한 국세청 조사설 등으로 1980년대 초반부터 소비가 위축되었다. 메이커들은 자동차에 붙는 세금 중에 조세공과금이라도 내려 판매가를 낮추기를 원했지만, 정부는 그런 요구에 요지부동이었다. 한 예로 현대 포니 2가 340만 원대로 출시되자 전국 택시조합이 가격을 낮춰주길 원해 상공부의 지시로 1만 4,000원 인하를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경기가 좋지 않았다. 급속도로 세단의 소비가 주춤해 나타난 하나의 현상이었다.

통학, 통근용으로 인기가 높았던 봉고

심지어 1980년대 초반 승용차를 산 사람 중에 트렁크에 물건을 가득 채우고 물건을 팔고 다니던 '마이카 행상'의 등장은 레저보다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했던 시대로 변해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기아는 현대 HD1000과 동급의 소형 버스가 승용차와 상용차를 모두 아우를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기아마스타 봉고 코치 12인승 모델과 루트 밴을 출시했다.

1981년 기아마스타 봉고 코치/루트 밴 출시 광고

이 모델 또한 전년에 출시한 1톤 디젤처럼 마쓰다의 모델이지만 다른 점이 있었다. 바로 우리나라 최초로 트럭처럼 많은 짐과 3, 6명의 승객이 함께 이동할 수 있는 승합차와 상용차의 두 가지 모습을 가진 루트 밴은 마쓰다 봉고에는 없는 모델이었다. 봉고 코치는 12인승 미니버스였으나 1톤 트럭과 섀시를 공유했기에 화물을 싣기에도 전혀 부담이 없는 독특함을 가지고 있었다.

출처: 위키백과
기아 봉고 나인

도어도 슬라이딩 방식으로 좁은 골목에서도 승객과 물건이 드나들기에 편했고, 해치식 뒷문 덕분에 크고 긴 짐을 옮기기도 편했다. 이후 1종 보통이 아닌 2종 보통 운전면허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상용차로 사용할 수 있도록 9인승 봉고 나인도 등장했다. 봉고는 승용차의 안락성과 상용차의 넉넉한 적재량을 가진 상용 밴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자 지금의 카니발의 장점이 만들어진 시작점이었다.

다양한 모델로 사랑받았던 봉고 광고

그 시대에 대중이 원했고 필요했던 승합차였던 봉고는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1984년에는 봉고 캠핑 이벤트가 열리기도 했다. 바캉스나 휴가철에 가족을 위한 여행에도 봉고가 주는 즐거움을 널리 알리고 싶은 기아의 마음을 담은 서비스 행사였다. 기아는 대중을 의견과 시대를 읽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네 삶과 함께한 박스카 봉고

이후 봉고는 트럭과 승합차의 운명이 갈렸다. 트럭은 봉고라는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고 세대를 이어갔다. 반면 승합차는 봉고 타운 이후 1986년 베스타가 등장하며 명맥을 끊어지는 듯하다가 2004년 베스타의 후속 모델 프레지오를 상품 개선하여 봉고 3 코치라는 이름으로 재등장했지만 2006년 단종의 길을 달렸다. 안전 및 환경규제 즉 ‘전방조종 자동차 안전기준 강화’에 대응하기 어렵다는 기아의 판단하에 내려진 결정이었다. 재미난 것은 일본 마쓰다 봉고와 달리 트럭이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기아 봉고 3 EV

기아 봉고의 시작은 마쓰다 봉고와 같았지만, 끝은 완전히 다른 운명이었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봉고는 우리나라 기술로 만들어진 트럭이다. 원박스카 형태의 봉고만 단종되었을 뿐이다. 심지어 전기로 달리는 EV도 나왔으니, 언제까지 우리 곁에서 달릴지 모르겠지만 봉고는 1980년대부터 우리의 자동차 역사와 삶을 담아 옮겨주던 차였다는 것은 확실하다.

글 윤영준 (자동차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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