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음직스러우나 먹을 수 없는 도넛을 굽는 아티스트

조회수 2020. 9. 21. 12:5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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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도넛 굽는 아티스트
김재용 조각가

만개한 계절화 만큼이나 아름다운 도넛이 소격동의 오후에 활짝 피었다. 큼지막한 도넛 위에 달달한 햇살을 얹어 눈으로 맛보고 마음으로 삼키니 온 몸 가득 행복의 기운이 퍼진 다. 흡사 부드러운 도넛을 한입 크게 베어 물었을 때의 풍요로움이다. 우리는 흙으로 정성스레 빚고 구운 도넛으로전 세계 사람들에게 삶의 기쁨과 행복을 전하는 사람, 조각가 김재용을 만났다.

Q.

학창 시절의 작가님은 어떤 학생이었나요?

A.

저는 어릴 때 쿠웨이트와 사우디에서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한국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한국의 교육방 식에 항상 의문을 품고 있었답니다. 모두가 똑같은 걸배우고, 똑같이 생각하길 강요당하는 것 같았거든요.

질문을 했을 뿐인데 혼이 나기도 했고, 잘못한 게 없는데 매를 맞기도 했어요. 각자가 가진 생각과 모습이 그저 다를 뿐인데 그걸 이해받지 못하는 것 같아 힘든 날들이 많았죠. 때로는 눈에 보이는 수많은 규칙들 외에 도, 보이지 않는 더욱 많은 룰들이 존재한다고 느끼기도 했어요.

Q.

어떤 계기로 조형작가가 되셨어요?



A.

고등학교 때 조소부에서 처음으로 조각을 했어요. 그때 조소부에 가입한 이유는 사실 평일에만 활동을 하고 주말에는 쉬는 활동을 찾다가 조소부가 재미있어 보여서였는데, 막상 해보니 아, 이거구나! 싶어 조각에제 인생을 걸기로 마음을 먹었어요. 조각을 한다니 가족들이 다 반대했고 특히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어요.

하지만 어디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있나요. 조각이 너무 좋아 학원에 가서도 늦게까지 남아서 작업을 하거나 주말에도 나가서 작업을 했어요. 본격적인 공부는 1998년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코네티컷주 하트퍼드 대학 안에 있는 하트포드 아트스쿨에서 조각을 전공하며 시작했죠. 그런데 한 번은 교수님께서 도자를 전공 하면 스튜디오 하나를 더 주겠다고 하셨어요. 스튜디 오가 하나 더 생긴다는 건 작가로서 좋은 조건이거든 요. 그래서 도자를 복수로 전공했는데, 졸업할 무렵이 되니 도자 조각 작업의 비중이 꽤 커졌죠.

Q.

미국에 갔을 때 동양인으로서 인종차별을 겪지는 않았나요?

A.

있었겠죠. 하지만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또는 어떤 집단에서건 벽은 항상 존재합 니다. 다만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의 차이일 뿐이 라고 생각하며 살았어요. 분한 일이 생길 때면 내가 잘못했나 보지 뭐, 혹은 상대방에게 다른 이유가 있었겠 지. 라며 단순하게 생각하고 사소하다 싶은 건 넘어갔 어요. 물론 누군가 부적절한 대우를 받았을 때 함께 분개하며 신고를 하는 일도 많았어요. 그렇지만 차별을 핑계로 위축되지는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세계투어를 위해 방문한 여러 지역에서 때로 문화적 차이로 인해 화가 날 만한 일을 겪었을 때도 저는 대부분 ‘다르니까 이해하자’거나 ‘다르니까 재미있다’고 받아들였죠.

뭐 때로는 제가 한국인이고 아시아인이기에 받은 혜택도 있지 않았겠어요? 사람들이 나를 어떤 시선으로 보던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나의 작업에 최선을 다해 그결과로 인정받는 데 있다고 생각했어요. 내 모든 것을 걸고 일 할 때, 그 과정과 결과를 존중해주는 사람들은 항상 있거든요.

Q.

미국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중 돌연 한국행을 결정한 이유가 있나요?

A.

대학교 3학년 때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의 큐레이터가 공모전에 출품한 제 작업을 보고 전화 한 통을 걸어왔 어요. 같이 일해보고 싶다더군요. 순간 운전도 서툰 내가 이 무겁고 깨지기 쉬운 작품들을 어떻게 트럭에 싣고 구겐하임까지 갈까 싶어 눈앞이 캄캄했어요. 어렸던 거죠. 결국 말도 끝까지 다 들어보지 않고 거절했던 일화가 있는데요, 어쨌든 대학교 때 열심히 한 덕분에 졸업하기도 전에 제 이름을 세상에 알릴 기회가 많이 찾아왔어요. 인종과 성별, 나이와 국적을 모두 떠 나 단지 실력만으로 세상 사람들이 나와 나의 작품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니 두려울 게 없고, 못할 게 없겠다 싶더라고요. 몽클레어 주립 대학교(Montclair State University)에서 10년간 교직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전시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내 나라에서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도 컸어요. 15년이 지난 후 나는 한국인이니 내나라로 돌아가 전시도 하고 학생들을 가르쳐보고 싶어 용기 내어 한국행을 결정한 거죠.


도넛 피어(Donut Fear)

이번에는 한국에서 열었던 개인전 ‘도넛 피어’의 이야기를 해볼게요.


김재용 : 오늘 인터뷰를 위해 도넛 피어 전시의 전반을 기획 및 디렉팅 한 우정우 큐레이터를 모셨습니다.

우정우 : 도넛 피어에 대해 자주 설명하는데, 매번 할 때마다 조금씩 이야기가 달라져요. 먼저 도넛의 탄생 배경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선생님의 작가로서의 삶만큼 중요한 것이 아버지로서의 삶인 데, 경제 대공황이 있었던 2007년 무렵 작가로서 삶을 이어가야 할지, 수입이 불확실하니 다른 방식으로 전환해 돈을 벌어야 할지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하셨다 합니다. 그때 지인이 도넛 사업을 제안했고, 제안을 듣고 아이디어가 떠올라 흙으로 도넛을 만들기 시작하셨대요. 누구나 즐겨먹는 고열량의 도넛은 때로 가난한 이들이 배부르게 한 끼를 하기 위해 자주 먹는 음식 이기도 하죠. 선생님은 세상에 긍정적인 효과를 줄 수 있는 밝은 작품을 하고 싶었고, 도넛으로 인한 풍족감을 눈으로 느낄 수 있는 보는 도넛을 벽에 걸기로 하신 거죠. 도넛은 전 세계 어디 에나 있어요. 한국에도 가락지 빵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해 왔죠. 그런데 우리가 도넛이란 단어를 들었을 때 음식으로 생각하지, 눈으로 소비한다는 생각은 못하잖아요. 도넛은 작가로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던 중 발견한 것의 결과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김재용 : 첫 번째로는 눈으로 맛보는 도넛이 사람들에게 행복감을 줄 수 있었으면 했어요. 두 번째로는 세계 어디에도 도넛을 메인 스토리로 작업하는 작가는 없었어요. 도넛은 저에게 실험적인 소재 였죠. 게다가 정말 실용적이에요. 크기를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가 있고, 재료도 바꿀 수 있죠. 스테인리스로도, 세라믹, 페이퍼도 모두 가능하며 얼마든지 다양하고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있어요. 다른 나라에 투어를 갈 때면 박스에 넣어서 운송하기도 편하죠.


언제까지 도넛을 구우실 건가요?


수요가 존재하는 한 계속할 거예요. 지금도 종종 전시를 하러 와달라는 연락을 받아요. 그럼 가야죠. 제 작품 으로 그 나라 사람들이 기뻐한다면 얼마든지요. 그런데 일부 국가에는 조형물을 운송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라 평면작업도 필요해요. 그래서 요즘은 종이로 작업을 했을 때 어떻게 조형만큼이나 입체적인 효과를 줄수 있을지에 대해 연구하고 있어요.

Q.

도넛 피어를 보며 관객들이 무엇을 느끼길 바라나요? 의도한 바가 있나요?

A.

이번 학고재 개인전의 메인 작업 중 하나가 ‘Donot fear to shine’ 인데요. 해석하면 ‘빛을 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이죠. 나의 내면, 솔직한 내 모습을 감추지 않고 마음껏 빛내며 살아가는 건 축복이라 생각해요. 제 작품을 보는 사람들이 그렇게 각자의 자리 에서 빛을 내며 살아가기를 바라요. 가끔은 저 또한 빛을 내는 게 두려울 때도 있어요. 주변의 시선도 의식하게 되고요. 하지만 그럴수록 더더욱 반짝반짝 빛을 내야겠다 마음을 먹곤 하죠.

달팽이의 꿈

Q.

가장 힘들던 시절 작가님을 버티게 해 준 힘은 무엇이 었나요?

A.

미국에서 조소를 배우고 싶어 하는 친구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는 제가 정말 돈도 없고 다음 달에는 어떻게 생활할지 상상도 안될 만큼 암울한 상황이었거든 요. 그 친구에게 제안했어요. 매일 아침 오전 9시에 작업실에 오면 내가 아는 걸 전부 가르쳐주겠다. 매일매일 오기만 하라고. 그렇게 그 친구는 저의 첫 어시스턴 트가 되었죠.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현명한 선택이었 어요. 아침마다 홀로 눈을 뜨는 게 너무 힘들었고, 돈도 없고 미래도 보이지 않아서 어떻게 사나 싶었는데 저와 함께 작업하기 위해 대중교통을 갈아타고 한 시간 반 동안 저의 작업실에 왔던 그 친구와 이른 아침 부터 밤늦게까지 함께 일을 하고 조소를 가르치다 보니 작업에도 속도가 붙고 삶에도 활력이 생기기 시작한 거예요. 가장 힘들던 시절 저를 버티게 해 준 건 그친구였습니다.

Q.

한국 국적의 예술가로서 느끼는 일종의 책임감이 있나요?

A.

대학교 2학년 때 미술사 수업을 들었어요. 현대미술에 대해 강의를 듣는데 ‘뉴미디어의 아버지, 백남준’이 라는 문장을 보고 감동을 느꼈죠. 전 세계의 유수한 인재들이 모여 듣는 강의에 사용되는 교재에 한국 예술가의 이름이 적혀있다는 게 참 자랑스러웠어요. 그날 저도 언젠가 책에 이름을 올리는 사람이 되어야겠 다고 마음먹었죠. 활동을 하며 이름을 바꾸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바꾸지 않은 이유는 저보다 앞서 백남준 씨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어느 나라에서 전시를 하건 제 본명으로 해나가고 있어요. 벌어들인 돈은 모두 다음 전시를 준비하는 데 소진하죠. 비단 저만을 위해 하는 일은 아니에요. 다양한 국가에서 활동하는제 수많은 제자들이 전 세계에서 저를 지켜보고 응원하고 있음을 아니까.

Q.

마지막 질문입니다. 작가님의 꿈은 무엇인가요?

A.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신체의 건강도 중요하나 정신적으로도 중심이 서있어서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바른말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어요. 앞으로 건강하고 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인정받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리라 믿고, 저 또한 그런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습니다. 다른 하나는 세계적인 작가가 되는 것. 살아있다면 앞으로도 열심히 작업을 이어갈 거예요. 오늘 일하다가 죽을 것 같고 정말 힘들어도 지금 재미있고 보람 있는 작업을 하고 싶어요.

출처: 레전드매거진 2020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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