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와 침묵: 숙명여대 트랜스젠더 입학 논란에 관하여

조회수 2020. 2. 7. 20:4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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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여대 트랜스젠더 입학 논란.. 결국 학생은 등록을 포기했다.

“최근 숙명여대에 성전환자 수험생이 합격한 일을 둘러싸고 교내외 여성주의 단체가 앞다퉈 찬·반 견해를 내놓고 있다. 성전환자의 입학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과 환영한다는 의견이 대립하며 갈등이 커지는 형국이다.”

-중앙일보, 숙대 성전환 합격자에 두쪽난 여대…”女권리위협” vs “환영” (오원석, 2020. 2. 4.)

나는 숙명여대를 “두쪽난 여대”라고 표현한 기사 제목에 동의할 수 없다. 기사에서 동의할 만한 근거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상식적이고 경험적인 추론을 동원해 ‘가정’해서 기사 제목을 썼더라도 나는 그 기사 제목의 틀짓기(프레임)를 우려한다. 그 제목은 마치 성전환자의 입학이 ‘찬반 토론’이 가능한 ‘정책적 선택’, ‘철학적 판단’의 문제인 것처럼 설정해(“여 권리위협” vs “환영”) 마치 ‘혐오’를 선택가능한 철학적이거나 정책적인 ‘입장’인 것처럼 독자가 착각하게 한다.

무엇보다 그 제목은 ‘혐오(세력)’를 과잉대표하는 효과를 만들어 그런 혐오가 널리 사회적으로 세력을 가진 것처럼, 그리하여 그런 혐오집단의 구성원으로 하여금 그런 혐오가 자신의 권리인 것처럼 착각하게 한다.

출처: Steven Depolo, CC BY
항상 ‘혐오(세력)’은 과잉대표된다.

과잉대표되는 ‘혐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트랜스젠더를 반대한다’는 문장은 비문이다. 그것이 형식적으로는 성립가능한 문장이라고 하더라도, 내용으로서는 성립할 수 없는, 성립해서는 안 되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즉, 트랜스젠더는 서로 입장을 두고 토론해야 하는 철학적이거나 정책적인 판단 문제가 아니다. ‘트랜스젠더 반대’는, 진심으로 진심으로,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혐오와 증오를 드러내는 일이다. 그것은 스스로 자신에게는 부끄럽고, 쪽팔린 일

왜 그런가. 왜 저들의 반대는 철학이나 정책이 아니라 그저 혐오인가.

성적 지향(性的指向, Sexual orientation)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적 지향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극소수이지만, 과잉대표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래디컬’ 페미니즘 단체의 무지에 바탕한 ‘징징거림’이 아니다. 이 문제는 이미 의학적으로는 논란이 종식된 문제로 대다수 정신의학 단체와 심리학 단체의 ‘공식 입장’이다. 더불어 이런 과학적(의학적) 결론은 사회적인 제도로서 다수 판례로 표현되고 있고, 차별금지법과 같은 포괄적인 인권법의 형태로 제정되는 과정에 있다.

“‘성적 지향’은 개인의 선택 문제가 아니다.”
“특정한 성적 지향의 발달에 관한 메커니즘은 아직 불불명하다. 하지만 현재 이 분야 논문과 학자 대부분은 성적 지향이 개인의 선택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즉, 개인은 동성애자 또는 이성애자를 선택하지 않는다.(2004, 미국 소아과학회)“

위 입장과 궤를 함께 하며 성적 지향을 ‘개인의 특징’으로 볼 수 없다고 발표한 영미의 대표적인 정신의학 단체는 다음과 같다. 여기서 ‘개인의 특징’은 그 개인이 스스로 자기 책임으로 선택할 수 있다는 전제적 의미를 내포한다.

- 미국심리학회(2006)
- 미국정신의학회(2006)
- 미국립사회사업가협회(2006)
- 영국왕립정신과협회(2007)
출처: 퍼블릭 도메인
성적 지향은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성적 지향 문제는 아주 복잡하고, 그 메커니즘은 아직 과헉적으로 설명되지 않았지만, 성적 지향이 개인의 선택 문제가 아니라는 것만은 자명하다. 그런데도 그것을 ‘선택’의 문제로 보고 그 개인들을 비난하는 혐오집단이 있다.

그런데도 그 혐오를 자신의 권리로 착각하는 이들이 있다. 심지어는 그 혐오에 역사성과 사회성,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 혐오가 마치 ‘페미니즘’의 폼나는 첨단인 것처럼 포장한다. 무지의 극치고, 오만의 극치다. 페미니즘의 드넓고, 다양한 스펙트럼을 관용적으로 포용해야 하더라도, ‘혐오’를 페미니즘이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혐오는 혐오다. 그 혐오에 어떤 역사적 정당성도 정책적 여지도 인정해선 안 된다.

그런데도 다수 언론이 그 혐오를 ‘래디컬 페미니즘’이라고 인정하고, 홍보하며, ‘클릭 저널리즘’의 수단으로 활용한다. 트랜스젠더를 반대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고 착각하는 어떤 개인과 집단이 있고, 그런 개인과 집단이 스스로 자신이 ‘래디컬 페미니즘’이라고 역사적 사회적 정체성을 부여한다. 그리고 그런 조직의 주장을 사회 구성원에게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전달하는 언론이 있다. 그야말로 블랙코미디다.

침묵하는 학생 대표 ‘모두’

내가 개인적으로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다. 한 소셜미디어에서 ‘이상한 성명서’를 봤다. 트랜스젠더 입학생을 비둘기로 비유하면서 조롱하는 더할 수 없이 추잡한 글(‘인간은 비둘기가 될 수 없다’, 클릭은 비추)이었다. 이게 뭐지? 비둘기? 궁금해서 이것저것 검색해보니 숙명여대 트렌스젠더 입학생 문제더라. 이런 정신나간 성명서는 이것말고도 여럿 있는데 굳이 언급하고 싶진 않다.

이런 무가치한 증오와 조롱에 일말이라도 관심을 유도하고 싶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런 몰상식한 증오와 혐오가 ‘조롱’이라는 가장 악질적인 형태로 표출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고, 앞서 우려한 것처럼 이런 증오와 혐오는 필요 이상으로 과잉대표되는 경향성을 가진다. 적어도 학교 바깥에서 기사화까지 된 마당에 학내에서는 마땅히 이런 저런 ‘소동’이 있을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숙명여대 학생들의 대표 집단인 총학생회의 반응이 궁금했다. 당연히 의연하고, 엄중하게 이 문제에 관해 총학생회의 입장을 밝혔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숙명여대 총학생회의 페이스북 페이지를 찾았다. 하지만 기대는 산산조각났다.


트랜스젠더 신입생 입학 관련 기사에 대한 총학생회 입장문

안녕하세요. 전진숙명 제52대 총학생회 ‘모두’입니다. 31일 3시 36분 경 총학생회 공식 메일 창구로 <기사 관련해서 총학생회 입장 올려주세요>라는 제목의 메일을 받았습니다. 해당 메일은 트랜스젠더 신입생 입학과 중앙일보 관련 기사에 대한 총학생회의 입장을 게시해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이에 총학생회 ‘모두’는 관련 입장문을 게시합니다. 이하 메일 전문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숙명여대의 한 재학생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중앙일보 기사에서 총학생회 ‘모두’가 정례회의를 통해 조만간 입장 발표한다고 하셨는데 이 회의엔 누가 들어오고 무슨 자격으로 논하는 건지 의심스럽습니다. 현재 학교의 학생들은 트랜스젠더인 남성의 입학에 매우 두려움을 느끼고 분노하는 상황인데도 총학생회에서는 이런 학생들의 입장을 반영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학생들을 대변하는 건가요? 이에 대해 총학생회의 입장이 궁금합니다.

총학생회는 1월 31일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해당 기사가 나게 된 경위를 파악하였습니다. 그 결과, 30일 16시 20분 경 중앙일보의 모 기자로부터 트랜스젠더 신입생 입학 관련 총학생회 입장을 알려달라는 연락을 받았고, 해당 시간에 상근을 하고 있던 한 총학생회 중앙집행국원이 해당 전화를 받았음을 확인했습니다. “담당자가 아니기 때문에 답변 드리기 어렵다. 메일 주소 알려드릴 테니 공식 이메일로 문의 달라.”는 중앙집행국원의 답변에 해당 기자는 “이메일에 대한 답은 회의를 통해 결정 되느냐, 안건으로 상정되어 논의하는 거냐”고 했고, 중앙집행국원은 “이메일은 회의를 통해 논의되는 경우도 있지만 답변 사항 없는 이메일은 회신하지 않는다.”는 평소 총학생회 전화 업무 매뉴얼을 전달하였습니다. 특히 ‘정례회의’와 같은 구체적인 단어를 사용한 답변을 전달한 적 없는 것으로 파악하였습니다.

총학생회는 현재 논란이 불거진 기사 내용이었던 ‘정례회의를 통한 입장 발표 예정’이 사실이 아님을 밝힙니다. 현재 총학생회는 해당 기사를 보도한 중앙일보 기자에게 정정보도를 요청한 상태입니다. 오늘 오전 총학생회는 사태 파악을 위해 입학처와 커뮤니케이션팀에 문의하였습니다. 그 결과 두 부처 또한 관련 기사를 통해서만 상황을 파악하였으며, 등록기간이 끝나기 전에는 입학 관련 답변이 어려운 상태임을 확인하였습니다.

총학생회는 신입생의 입학 및 재적 여부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이 일절 없습니다. 그러나 ‘모두’는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학우분들께 공유되지 않은 사항이 기사로 보도가 된 사실과 그로 인해 상처를 받으셨을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현재 총학생회 차원에서 인터뷰, 기자회견, 공식 성명이나 관련 발표 등은 예정되어 있지 않음을 다시 한 번 밝힙니다.

총학생회 ‘모두’는 모든 숙명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0. 01. 31.

전진숙명 제52대 총학생회 ‘모두’

게시물 담당자: 총학생회장 임지혜

(출처: 숙명여자대학교 총학생회 페이스북)

(참고로, 메일 직접 인용 표시와 강조 및 익명 기자 표시 기사의 링크 표시와 가독성을 고려한 문단 나눔은 편집자)

우리는 현재 우리가 도달한 과학적 지식, 그 지식의 극히 일부로서 널리 통용되는 상식, 그 상식의 경계에서 서로 다르게 형성된 지역의 역사적 관습과 거기에 영향받은 문화, 더불어 그것마저도 흐트러뜨리는 개인적 경험의 한계라는 지극히 불안정하고 제한적인 토대에서 어떤 사물을, 어떤 현상을 판단한다. 그 당연한 한계를 고려하더라도 성전환자가 자신의 성별을 마치 좋아하는 시계를 수집하듯이 멋진 구두나 지갑을 고르듯이 ‘선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혐오집단의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것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는 앞서 설명한 바다.

각설하고, 대학의 총학생회가 “신입생의 입학 및 재적 여부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이 일절 없”기 때문에 침묵한다고 말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아주 실망했다. 그리고 화가 났다. 내 심정을 그대로 대변하는 두 댓글이 그 성명서 게시물에 있더라.

메일의 내용을 읽어보니 입장 밝힘과 주어를 보니 확실히 숙명여대 재학생임이 틀림없네요. 15학번 졸업생으로서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공학이 아닌 여대라는 타이틀을 , ‘여성 우월, 여성만을 위한 학교가 여대’라는 정의를 내리고 있는 듯 합니다. 우리 숙명여대는 적어도 제가 졸업할 때까지, 그리고현재 타대학원에서도 자랑스러히 여기는 부분은 “여성우월”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평등한 여성”입니다.

그러나 가장 하위적인 가름의 기준인, 성별을 논하여 새 입학생에게 어떠한 고통을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새 입학생, 그 또한 사람입니다. 성별로 왈가왈부하며 우리가 배제해야 할 대상이 아닌, 성별이기 전에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는, 타인에게 환영을 받을 권리가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입니다.

총학에게 메일을 보낸 그에게 한마디 올린다면, 당신은 여성의 조건과 평등을 논하기 전에,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소양을 가지고 계신지 스스로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또한 보편적 일반화적 주장을 내세우는 당신이 과연 우리 숙명여대의 재학생임에 당당한지 생각해보십시오.

졸업생으로서 굉장히 부끄러운 후배를 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김수연)
“특정 사회적 소수자 개인에 대해 학내에서 집단적인 괴롭힘이 이어지는 상황인데, 이 상황에 관하여 최소한의 올바름도 주장할 수 없는 ‘총학생회’의 ‘공식적인’ 존재 이유는 뭘까요? 학우들 거수기 노릇 할거면 학생대표자는 굳이 존재할 이유가 있나요? 총학생회 왜 하세요?” (Kang *****)

부끄러운 날

하지만 무엇이 숙명여대 학생들의 대표자인 ‘모두’를 이토록 겁쟁이로 만들었는지 궁금했다. 내 개인적인 체험에 빗대면, 어떤 맹목적인 증오는 사람은 질리게 한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이 말처럼 요즘의 무기력한 나에게 와닿는 말은 없다. 나도 누구못지 않은 겁쟁이니까.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은 그런 심정. 그래 그냥 니들끼리 그렇게 치고받고 그렇게 살다가 가라. 난 빠질란다. 그렇게 방관자가 되고, 그렇게 겁쟁이가 된다. 그렇게 침묵한다. 당신을 비난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냥 내가 그렇다.

출처: 퍼블릭 도메인
증오를 자라게 하는 가장 비옥한 토양, ‘침묵’

그래서 난 숙대 총학을 대단히 예외적이고, 일탈적인 존재로 여겨 그 비겁함을, 그 무책임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숙명여대 총학만 겁쟁이라서 그런 무책임한 성명을 발표한 것은 아닐 것으로 생각한다. 숙명여대 학생들 일부에게 눈먼 증오를 자라나게 한 숙주가 대한민국의 자극적이고, 성찰 없는, 돈과 권력이 유일한 목표인 의미 유통 시스템이라면, 숙명여대 총학의 비겁함과 무책임은 눈부신 학생운동의 영광과 함께 양극화와 차별을 한국적 특수성과 역사성으로 축적한 우리시대의 설계자 586의 산물이기도 하다.

나무가 있으려면 땅이 있어야 하고, 곰팡이가 자라려면 숙주가 있어야 한다. 비겁한 겁쟁이를 키우고, 눈먼 증오자를 자라게 한 숙주, 그리고 그 숙주를 무럭무럭 키워온 ‘꼰대’들에게도 책임은 있다. 혐오가 사회를 어떻게 망칠지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 혐오를 정치적인 유불리에 따라 조장하거나 묵인하는 정치과 한푼의 ‘클릭’으로 조장하는 언론에 그 책임이 있고, 차별을 당연시하는 온갖 제도적 관습적 폭력과 특권을 오히려 ‘선망’하게 한 이른바 성공한 ‘지도층’에 더 큰 책임이 있다. 그러니 사회의 이중성을 자신의 출세를 위해 평승하고, 조장한 꼰대들, 그리고 무의미한 생존을 이어가기 위해 혹은 귀찮아서 알면서도 거기에 침묵한 나 같이 비겁한 꼰대들에게도 책임은 있다.

여성(남성)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 자기 정체성의 짝패로 남성(여성)을 타자화하고, 그 타자를 절대적으로 악마화하며, 그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일부 개인과 그 집단을 더는 묵인해선 안 된다. 나는 그런 개인과 집단에게는 예외 없는 불관용이 원칙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그 혐오와 증오를 ‘선택 가능한’ 어떤 것으로 여기는 일체의 행위와 해석을 불허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제도(차별금지법)가 되어야 하고, 그런 행위를 스스로 부끄럽게 여겨 감히 시도하지 못하는 문화와 상식이 자리해야 한다.

그리고 방금 전 소식, 숙명여대 트랜스젠더 입학생이 등록을 포기했단다.

기쁜가.

슬프다.

미안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끄럽다.

“우리에게 희망이 주어지는 것은
오로지 희망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다.”

(발터 벤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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