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졸에 무직인 저를 전문대 교수로 만든 아내

조회수 2020. 5. 14. 09:5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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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심현용·39)는 인생 첫 직장에 첫 출근한 날 회사를 그만두려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인생 반려자(김지원·여·35)를 만납니다. 고졸에다 변변한 기술도 없는 제게 지원 씨의 격려 한마디가 엄청난 마법을 일으킵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요?

 저와 제 아내 지원 씨는 한 통신회사 입사 동기로 만났습니다. 학창시절 맨날 놀기만 했던 저와 달리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아내는 다른 세계 사람 같았습니다. 호감은 생겼지만, 고백할 용기는 나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이직을 위해 면접을 보러 갔습니다. 고졸인 저를 그 회사는 매몰차게 내쳤습니다.  

 면접을 망치고 집으로 가는 길, 햇살은 어찌나 그렇게 예쁘던지, 참 외롭고 서글프더라고요. 

지원 씨 생각이 났습니다. 무작정 전화했죠. 

  "그 회사가 나랑 안 맞더라고!"  

 섭섭한 속내를 애써 감추고 있는데, 지원 씨가 제게 말하더군요.  

 "오빠, 그림 그리는 거 보니깐 센스 있던데 디자인 공부해보는 게 어때?" 

 처음으로 "잘한다"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격려에 힘을 내 디자인 학원에 등록했습니다. 전 재산 400만 원. 그 중 360만 원을 1년 치 학원비로 썼습니다. 나머지 40만 원으로 버티며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밤에는 야간대학도 다녔습니다. 지원 씨는 고시공부 뒷바라지하듯 물심양면 지원해줬습니다.  

 제가 산업 기사 자격증 시험에 합격한 날, 지원 씨가 기뻐하며 엉엉 울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때 딴 자격증을 활용해 그래픽 직업훈련교사로 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인에게서 호주로 떠나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당시 제 나이 31살.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지원 씨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지원 씨는 그냥 애인 사이로 호주에 갈 경우 양가 부모님이 어떻게 생각하실 지 걱정했습니다. 

 양가 부모님을 찾아가 결혼을 허락받고,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호주에 도착했을 때 수중에는 600만 원 밖에 없었습니다. 저희 부부는 호주에서 닥치는 대로 일했습니다. 전 한 프랜차이즈 회사 디자인 실장으로 자리 잡게 됐습니다. 아내 역시 지역 신문사 객원 미술기자로 일하게 됐죠. 하지만 아내는 호주 생활이 잘 맞지 않았던 것 같아요. 결국 다시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3평짜리 단칸방→8평짜리 월세→14평짜리 전세→25평 아파트로 집을 넓혀나갔죠. 아내는 디자인 회사를 운영하면서 기업 컨설팅을 하는 컨설턴트로 성장했습니다. 저는 그래픽 학원 원장으로 일하다 지금은 전문대학 객원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힘든 순간에도 제 손을 놓지 않은 아내에게 정말 고맙습니다. 아내와 함께 험한 세상을 당당하게 헤쳐나가려 합니다." 

sum-la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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