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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만 원 짜리 맥주의 배신

조회수 2018. 11. 12. 11:1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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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여러분 디에디트 에디터M이다. 세상엔 수많은 맥주가 있다. 그동안은 여러분이 꼭 마셨으면 하는 것들을 선별해 소개해왔다. 그런데 오늘만큼은 여러분이 절대 사지 않을 맥주를 들고 왔다. 왜냐고? 이건 꽤 비싸거든.

그렇다고 내가 여러분의 지갑 사정을 우습게 본다는 말은 아니다. 요즘 맥주는 금값이다. 얼마 전 이마트 맥주 코너에 갔다가 내 지갑과 영혼이 탈탈 털리는 끔찍한 경험을 하고 왔다. 돈이 없으면 맛있게 취하기도 힘든 세상이다.

와인 한 병 값을 우습게 만드는 귀한 몸들 사이에서도 오늘 소개할 맥주는 단연 돋보인다. 용량 375ml 한 병에 6만 9,000원. 대충 계산해보면 1ml에 200원 약간 모자란 값을 자랑한다. 맥주 한 모금에 10ml정도를 들이킨다고 가정하면, 당신은 한 모금에 2,000원을 마시는 셈. 꿀꺽꿀꺽. 주량 350cc인 내 위장에 엄청나게 과한 사치 아닌가.

게다가 이 맥주는 독특한 목걸이를 달고 있었다. 왜 맥주 한 병에 이만한 돈을 지불해야 하는지를 손글씨로 적은 뒤 심지어 정성스럽게 코팅까지 했다. 누군가 이 맥주에 대해 조사한 뒤 문구를 만들고 코팅까지 하고 있을 상상을 하니 문득 서글퍼졌다. 그리고 디에디트 비공식 호갱인 나라도 이걸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물론 에디터H의 달콤한 속삭임이 없었다면 불가능했겠지만.


“한 병에 7만 원짜리 맥주를 리뷰하면 

주류 전문 리뷰어의 위상이 높아질 거야.”


맥주 한 병에 7만 원에 가까운 돈을 쓰게 하다니. 이마트의 마케팅은 성공적이었다.

오늘 리뷰할 맥주의 이름은 러시안리버 브루어리가 만든 서플리케이션. 이마트에 딱 12병 한정으로 들어온 맥주다. 전 세계 맥주의 별점이 모이는 레이트 비어에서 무려 100점 만점에 100점을 받은 맥주기도 하다.


사실 비싼 가격이 아니면 시선을 끌기 힘든 개성도 매력도 없는 평범한 라벨이다. 아마 비싼 가격과 손글씨가 아니었다면 난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거다.

이 맥주를 만든 곳은 러시안리버. 워낙 평판이 좋은 곳이니 이름을 기억해두는 게 좋겠다. 당연히 러시아에 있는줄 알았겠지만, 이 브루어리가 있는 곳은 미국. 그것도 캘리포니아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와인으로 유명한 소노마카운티에 자리를 잡고 있다. 

그리고 오늘 소개할 서플리케이션 맥주는 이런 지역적인 이점을 한껏 살렸다. 양조장의 이름이기도 한 러시안 리버는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질 좋은 피노누아를 만드는 곳이다. 그리고 그 배럴을 가져다가 맥주를 숙성한다.


일단 맛 좋은 브라운 에일을 만든 뒤, 최고급 피노누아 배럴에 요즘 맥주 시장에선 잘 쓰지 않는 유행에 뒤처진 3가지 효모와 체리를 넣은 뒤 약 12개월을 숙성한다. 1년이란 세월 동안 오크나무와 체리 그리고 오래된 효모들이 한 데 뒤엉켜 멋진 화학작용을 만들어낸다.

이 맥주와 와인의 상관관계는 배럴에서 추가 숙성했다는 것 말고도 또 있다. 샴페인이나 스파클링 와인처럼 병안에서 추가 숙성을 통해 탄산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마개도 코르크다. 

덕분에 오픈할 때 꼭 샴페인을 따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결론적으로 오크통(배럴) 숙성부터 병인 후 숙성까지 상당 부분 와인에 발을 딛고 있는 맥주라 할 수 있겠다. 물론 가격도 여느 와인 못지 않지만.

병입된 시기는 2018년 1월 25일. 피노누아가 들어있던 배럴에서 1년 그리고 병 안에서 10개월을 잠들어 있던 셈이니 이 맥주는 적어도 2살이 넘었다. 맥주계에서는 이 정도 연륜이면 환갑잔치를 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다.

잔은 맥주잔이 아니라, 고블잔처럼 스템이 있는 와인처럼 생긴 잔에 마실 것을 권고하고 있다. 원래 비싼 맥주는 이렇게 까탈스럽게 군다. 사무실에 고블잔이 있긴하지만, 워낙 귀한 몸이시니 차마 두 병은 못 하고 대신 작은 와인잔에 따라 에디터H와 공평하게 나눠마시기로.

자 이제 마셔보자. 이 맥주는 과연 7만 원의 가치를 할 것인가. 사실 다년간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맛과 돈은 크게 상관관계가 없다는 걸. 비싸면 당연히 맛있겠지 희망을 가져보지만, 내 기대를 배신하는 경우도 꽤 자주 있다. 재화의 가치는 맛 같은 추상적인 게 아니라 희소성으로 정해지니까. 그래도 이만한 가격표를 붙였으니 그 궁금함을 숨기긴 어렵다.

색은 탁하다. 역시 딱히 식욕이 도는 색은 아니다. 맥주가 양조되고 2년이란 세월이 켜켜이 묻어있는 탁한 빛이다. 사람이건 맥주건 시간이 지나면 그 속을 알기 힘든 의뭉스러움이 깃든다.


혀를 대기 전에 일단 냄새부터 맡아본다. 음? 톡 쏘는 쉰내가 코를 찌른다. 에이 설마. 마시면 다르겠지.

이제 입을 댈 차례다. 한 입 마시마자 양 미간이 하이파이브를 하며 한없이 구겨지고, 잠이 확 달아나게 하는 그런 신맛이다. 이건 맛이라기보다는 충격에 가깝다. 희석하지 않은 감식초에서 느낄 수 있는 신맛. 사워에일이란 이런 것일까.


참고로 난 신맛을 좋아한다. 산미는 지방의 느끼함을 잡아주고 평범했던 맛에 개성을 더해준다. 잘 사용한 신맛은 평면적인 맛도 단번에 구조적으로 만든다. 그런데 이건 가도 너무 갔다. 강렬한 신맛이 전체를 지배한다. 혀를 가득 조이며 느껴지는 신맛 덕분에 양 침샘에서 흘러나오는 침을 수습하는데 급급하다.

강렬한 신맛이 지나가면 이젠 지독한 지푸라기 내음이 코로 뿜어져 나오며 나를 공격한다. 체리나 여타의 향은 강한 기에 눌려 큰 존재감이 없다. 알코올 도수도 7.75도로 꽤 높은 편이지만, 신맛과 오래된 가구에서 날 법한 쿰쿰함 때문에 알코올의 흔적은 저 뒤로 밀려난다.


리뷰를 위해 꾹꾹 참으며 마시고 또 마셔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오래 묵힌 청국장이나 삭힌 홍어를 먹은 외국인들의 충격이 이런 걸까. 마음을 가다듬고 조금씩 조금씩 마시다 보면 어느새 취기가 올라온다. 아 취한다. 내가 취하는 게 알코올이던가, 발효의 향이던가.

샴페인과 똑같은 발효를 거쳤다는데 생각보다 탄산은 그리 강하지 않다. 솔직히 말하면 잘 모르겠다. 아마도 내가 신맛 때문에 정신을 못 차려서 그럴 수도 있고. 다른 맛은 모두 잊어버렸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한 번 마시면 절대 잊기 힘든 맛이라는 거. 그리고 아마 난 다시는 이 맥주를 볼 수 없을 것이고 마시지도 않을 거라는 거. 강렬한 인상 면에서는 100점 만점에 102정도 아깝지 않다.

시간이 조금 지난 어느 오후였다. 전날 온 비로 길바닥엔 낙엽의 시체가 산처럼 쌓여있었다. 사람들의 무심한 발걸음에 짓이겨진 낙엽들이 부패하고 있었다. 차갑고 축축한 공기에서 난 기묘한 기시감을 맛봤다. 그래 바로 어제 맛본 러시안리버 서플리케이션의 향이었다. 두 번 다시 먹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그 맛이 문득 그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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