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트로 덕후의 비밀스런 물건 5

조회수 2020. 6. 19. 12:1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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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레트로의 끝을 향해 달리는 에디터B다. 오랜만에 ‘B의 취향’으로 돌아왔다. 에디터M이 쓰는 ‘M의 취향’을 보면 갖고 싶고 쓸 만하고 디자인도 예쁜 물건이 많은데, ‘B의 취향’은 쓸모 없어서 아무도 안 살 것 같은 물건만 사서 잔뜩 보여주는 편이다. 오늘은 더 심하다. 내가 애정하는 레트로 굿즈를 모아모아서 소개하려고 하는데…잠깐, 레트로는 어디까지가 레트로지? 조선 시대 굿즈도 레트로로 쳐주려나. 일단 시작한다.


“내 방을 조계사로”
풍경

풍경을 샀다. 내가 풍경을 샀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일단 귀를 의심한다.


“뭘 샀다고?”

“풍경이요.”

“그… 처마 끝에 다는 종?”

“네 그거요. 바람 불면 소리 나는 거.”


직장 동료는 이 정도 반응을 보인다. 친한 친구는 욕도 한다. 내가 한 일이라곤 마음에 드는 물건을 구매한 것밖에 없다. 관세포탈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밀수를 한 것도 아닌데, 왜 혼나는 기분일까.


풍경은 오디오 기기나 마찬가지다. 전기가 아닌 바람을 에너지로 소리를 낸다는 것만 다를 뿐. 풍경 소리는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는 조선의 ASMR이 아니었을까. 그러니 내가 이 제품을 산 이유는 단 하나, 소리가 듣고 싶기 때문이었다.


풍경 소리를 들으면 좋은 추억만 떠오른다. 꼬꼬마 때 엄마 아빠와 함께 절에 갔던 기억이 있다. 헥헥 거리며 땅만 보다 올라가면 어느새 절이 보이고 풍경 소리가 들렸다. 글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티 없이 맑은 소리였다. 풍경을 사고 싶다고 생각한 건 작년 여름 경주 여행 때였다. 한옥 카페의 처마 끝에 풍경이 걸려 있었다. 그 소리를 집으로 가져가고 싶었다.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룸에는 처마 같은 건 없지만 어떻게든 달면 되겠지 싶었다.

길이는 10.5cm, 무게는 약 413g, 황동으로 만들었다. 처음 풍경을 들어보면 무게감에 살짝 놀랄 정도로 묵직하다. 표면의 브러시 마감은 멋스럽다.


나처럼 집에 처마가 없다면 막상 풍경을 사도 어디에 걸어야 할지 막막할 수 있다. 그럴 땐 낚싯줄을 사용해서 바람이 잘 통하는 창문 가까운 곳에 걸어두면 된다. 카트라이더로 치열하게 경쟁하다가도 풍경 소리를 들으면 마음에 평화가 깃들 거다. 가격은 2만 6,400원.


“식탁을 우래옥으로”
놋그릇

놋그릇을 산 이유도 단 하나다. 냉면을 더 맛있게 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놋그릇에 냉면을 담아 먹는다고 맛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더 본질적인 것이 변한다. 그건 바로 냉면을 대하는 나의 태도와 마음가짐. 태도가 바뀌면 둥지냉면을 먹어도 우래옥 냉면을 먹는 기분이 날 수 있다. 예전에 한 래퍼가 “내가 하면 락도 힙합이야!”라고 이상한 소리를 한 적이 있는데, 이 경우도 비슷하다. 나는 “놋그릇에 먹으면 둥지냉면을 먹어도 평양냉면이야!”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헛소리다(혹시나 진지하게 읽고 있을까 봐).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해볼 수는 있다. 고급 한식당에 가면 놋그릇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수저와 그릇이 무거울수록 대접받는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인데, 반대로 플라스틱 수저와 일회용 접시에 먹으면 급하게 한 끼 때운다는 느낌이 들지 않나? 놋그릇을 사용하면 한 끼 식사가 고급스러워지기는 한다. 맛은 달라지지 않아도.


단점, 당연히 있다. 첫 번째, 비싸다. 이 냉면 그릇의 가격은 4만 6,000원이다. 두 번째, 관리가 어렵다. 내가 놋린이 시절에 그릇을 씻고 물을 제대로 닦지 않은 채로 둔 적이 있었다. 며칠 뒤에 보니 물기가 있었던 곳이 푸른색으로 얼룩덜룩해진 거다. 나는 놋그릇을 끌어안고 절망하며 네이버 블로그에서 이 아이를 살릴 방법을 찾고 또 찾았다. 결국 수세미로 놋이 슨 부분을 문질문질 닦아서 해결했는데, 물기에 취약한 그릇이라니 이것 참 큰 단점이 아닌가. 이때 주의할 점은 수세미를 한 방향으로만 문질러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야 무늬가 예쁘게 생긴다.

이런 치명적인 단점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놋그릇 추천하고 싶다. 평범한 한 끼를 특별하게 만들어줄 거다. 항상 같은 그릇에 먹는 식사, 뭘 먹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끼니, 만약 그 자리에 놋그릇이 함께 한다면? 분명 특별한 순간으로 기억될 거다.


“내 방을 힙지로 카페처럼”
자개소반

자개 소반을 샀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개st 소반’이다. 자개처럼 보일 뿐 자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자개의 영롱한 빛은 조개껍데기에서 온다. 조개껍데기 안쪽을 얇게 떠서 하나씩 오려서 붙이는 방식인데, 햇살을 받으면 영롱하게 빛난다. 하지만 내가 산 라미나 자개 소반은 그렇지 않다.

빛이 반사되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호랑이며 포도며 소반에 있는 그림은 기계로 프린트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괜찮다. 알고 샀으니까. 와디즈에서 7만 8,000원을 펀딩하고 받았는데, 실제 자개라면 이 가격에 이런 소반? 택도 없다.


펀딩 소개 페이지에도 높은 가격 때문에 자개가 대중화되지 못하는 문제를 언급하고 있었다. 가격은 비싼데 관리는 어렵고 시간이 지나면 조개껍데기가 떨어져 자개의 가치도 떨어진다는 내용이었다. 실제 자개를 써보지 않았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저렴한 가격에 괜찮은 만듦새로 멋진 자개 소반을 장만할 수 있어서 만족한다. 하지만 자개의 핵심인 영롱한 빛깔을 살리지 못한 건 아무리 생각해도 아쉽다.

소반은 조립식이기 때문에 상판이 따로 분리된다. 테이블로 쓰지 않더라도 쟁반이나 인테리어 소품으로도 쓸 수 있어서 활용도는 좋은 편이다. 호랑이의 익살스러운 표정도 마음에 드는데, 상판에 들어간 그림은 방윤정 작가의 작업물이라고 한다. 펀딩을 결정하기 전에 방윤정 작가가 어떤 분인지 찾아보려 애썼지만 정보가 없었다. 이것도 아쉬운 부분이다.


을지로의 힙하다는 카페에 가면 자개농 문짝을 떼어다가 테이블로 쓰거나 벽 인테리어로 활용한 걸 볼 수 있다. 나도 그들을 따라 문짝을 살까 싶어서 중고나라에 기웃거려 봤는데, 이내 포기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너무 헤비한 일인 듯해서.


“내 손목에 제임스 본드”
카시오 시계

카시오 전자시계를 사 본 적이 있나. 몇 명이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할지 모르겠다. 시계는 시간을 알려주는 도구가 아닌 패션이 된 지 너무 오래되었고, 럭셔리와 거리가 먼 카시오 시계는 경쟁력이 없어 보이니까. 그럼에도 젊은 사람들이 카시오를 찾는다니 흥미롭다. 한껏 멋을 낸 젊은이들이 카시오 시계를 차고 있는 걸 몇 번이나 봤다. 길거리에서도 카페에서도. 대부분은 ‘손석희 시계’였다. 내가 처음 샀던 카시오 시계도 손석희 시계라 불리는 CASIO A168WA-1WDF다. 가격은 2만 원대. 그리고 두 번째 카시오 시계가 바로 이것이다. 제품명은 AE-1200WH. 일명 본드 워치.

값비싼 최첨단 장비만 쓰는 제임스 본드가 한국에서 수능 준비를 했을 리도 없고, 306 보충대에 들어간 것도 아닐 텐데, 어쩌다 카시오 시계에 이런 멋스런 별칭이 붙은 걸까.


이유는 1983년에 개봉한 <007 옥토퍼시> 때문이다. 영화에서 본드는 방사능 측정기가 달린 세이코 G757 시계를 차고 나오는데, 지금은 그 모델이 단종되었고 G757을 오마주한 이 시계가 가장 오리지널에 가까운 모델이기 때문이다.

제임스 본드가 세이코 시계를 찼다는 것도 의아할 수 있겠지만, 예전에는 충분히 그럴 상황이었다. 1970년대에 있었던 이른바 ‘쿼츠 혁명’ 때문에 세이코가 주도하는 전자식 시계의 인기가 기계식 시계를 눌러버렸으니까. 배터리 비교도 안되게 오래 가지, 시간은 훨씬 정확하지, 내구성도 좋지, 미래적인 느낌 나지, 좋아할 이유는 넘쳤다. 그땐 그랬다. 이런 재미난 스토리가 있는 시계를 단돈 4만 원대에 구입했다.


“20년 전으로 시간여행”
카세트 플레이어

카세트 플레이어에 대한 추억 하나 얘기해보련다. 나는 중학생 때부터 음악을 좋아해서 라디오를 항상 켜두고 있었다. 음악이 아니라 라디오를 켜둔 이유는 테이프나 CD를 살 용돈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멜론도 없었고, 유튜브 뮤직도 없었으니까. 라디오 DJ가 음악을 틀어주기만을 기다렸다가 공테이프에 노래를 녹음했다. 그렇게 모아둔 테이프가 고향 집에 꽤 많이 쌓여있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그렇게 좋아하던 아이는 그래서 나중에 뭐가 됐을까. 뭐가 되긴, 음악을 좋아하는 어른이 되었다. 훈훈하지?

20년이 흘러 카세트 플레이어를 다시 산 이유는 이때 녹음했던 카세트를 듣고 싶은데 플레이어가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남전자의 카세트 플레이어를 샀다. 2019년 6월에 출시된 제품이다. 제품명은 아남 PA-730BTS.

일단 디자인에 대해 말하자면 레트로 느낌을 잘 살렸다. 실버/블랙의 조화나 주파수 다이얼, 버튼 조작감도 만족스럽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아쉬운 점이 몇 개 있는데, 메탈처럼 보이는 부분은 크롬으로 마감된 플라스틱이기 때문에 퀄리티가 조잡하다. 일시정지, 빨리감기 등 버튼 옆에 적힌 글자의 폰트도 아주 촌스럽다(굴림체인가?). 레트로한 느낌이 아니라 촌스러운 느낌. 차라리 아이콘으로 양각되었다면 훨씬 좋았을 것 같다. 하지만 5만 원대의 가격을 생각하면 이게 최선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단점을 말했으니까 장점도 하나 말해본다. 블루투스를 지원하기 때문에 카세트 테이프가 없어도 노래를 마음껏 들을 수 있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을 거다. 카세트 쓴다면서 블루투스로 노래를 듣는다고? 나도 이렇게 말하긴 민망하긴 하지만 실제로 사용해보니 추억여행은 5분이면 족하더라… 서태지 노래를 2곡 정도 듣고 바로 블루투스를 이용해 유튜브 뮤직으로 노래를 틀었다.

그때 알았다. 이 오디오의 가장 큰 무기는 어떤 소리도 라디오처럼 들리게 만든다는 것을! 팟캐스트를 틀거나, 유튜브에서 음악을 틀거나, 그 어떤 걸 재생해도 라디오에서 나오는 것 같은 기분이다. 어떤 소리를 틀어도 음질을 하향 평준화 시키기 때문에 소리가 레트로하게 들린달까.


혹시 나처럼 아남 카세트 플레이어를 산 사람이 없나 싶어서 찾아보니 프로듀서DK가 리뷰를 했더라. 디자인이 아니라 소리가 레트로라는 그의 평가에 크게 공감한다. 어린 시절 라디오 좀 들어본 사람이라면 이 제품을 추천한다. 만약 추억 여행을 떠나고 싶다면 이게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 아닐까. 타임머신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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