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나라는 고액권 지폐를 만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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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달러.
3월 25일 환율을 기준으로, 11만 3450원이다.
현재는 발권이 중지돼 유통만 되고 있는 500유로는 우리나라 돈으로 67만 145원이고,
일본의 1만엔은 10만 4240원이다. 중국의 100위안도 물가 수준을 고려할 때, 자국에선 한화로 10만원이 넘는 액면 가치를 갖고 있다.
앞서 언급한 돈들은 각국 화폐의 최고 권종들이다. 반면 한국의 최고액권은 5만원.
세계 주요국들에 비해서 확실히 그 가치가 낮다고 볼 수 있는데. 유튜브 댓글로 “왜 우리나라는 고액권 지폐를 만들지 않는지 알아봐 달라”는 의뢰가 들어와 취재해봤다.
한국은행이 고액권 지폐 발행을 공식화한 것은
지난 2007년.
1973년 1만원권이 발행된 이후 물가는 12배, 국민소득은 150배 이상 상승했는데, 은행권 최고 액면 금액은 그대로라 국민 불편이 적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고액권 부재로 인해 자기앞 수표 발행액이 증가, 사회적 비용이 발생하고, 국민들도 여러 장의 화폐를 휴대해야 하는 불편함을 겪고 있다는 게 한국은행의 판단이었다.
당시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는 5만원권과 10만원권을 2009년 상반기 중 발행하기로 결정했다.
지폐에 들어갈 인물도 선정했다.
5만원권에는 신사임당(앞면)과 월매도(뒷면)가,
10만원권에는 백범 김구 선생(앞면)과
대동여지도·울산 반구대 암각화(뒷면)를 넣기로 했다.
하지만 이듬해 정권이 바뀌면서 이 같은 계획에 제동이 걸렸다.
기획재정부가 한국은행에 10만원권 발행을 중단해달라 요청했고, 한국은행이 이를 수용하면서 5만원권만 발행하는 것으로 계획이 수정된 거다.
고액권이 부정부패에 활용될 수 있다는 점, 물가 상승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 신용카드 등의 전자화폐가 활성화돼 필요성이 줄었다는 점 등이 이유로 꼽혔다.
일단 5만원권의 유통 상황을 보고, 10만원권 발행 여부를 결정해도 늦지 않다는 게 정부의 판단이었다. 5만원권으로도 충분히 고액권 수요를 감당할 수 있다고 본 거다.
10만원권의 도안도 문제가 됐다. 앞서 뒷면에 들어가는 대동여지도 목판본에 ‘독도’가 없다는 점이 드러나면서 화폐 발행 작업이 늦춰졌다.
한국은행은 독도를 그려 넣은 필사본으로 대체하거나 아예 뒷면 도안을 바꾸려고 했지만, 정부가 반대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지폐 뒷면이 아닌 앞면 도안이, 정부가 발행을 포기한 진짜 이유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됐다.
당시 일부 보수층에서 10만원권에 김구 선생이 아닌, 박정희, 이승만 전 대통령을 넣자고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강만수 기재부 장관도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여러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결국 10만원권은 세상에 빛을 보지 못했다. 다만 시간이 흐른 현재. 세계적인 흐름은 고액권을 폐지하자는 쪽에 가깝다.
고액권이 테러 및 범죄 은닉 자금으로 활용되는 데다, 가상화폐, 간편결제 기술의 등장으로 ‘현금 없는 사회’로의 이행이 빨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럽 중앙은행은 지난 2017년, 최고액권인 500유로를 폐지했다. 유로존 각국의 재무장관들이 고액권이 테러 및 범죄 조직의 자금 보관, 세탁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며 지폐 폐지를 검토해달라 요청했기 때문이다.
EU 경찰청도 500유로는 일반 상점에서 받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도 전체 유로화 통화량의 30%를 차지해 범죄와 명백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봤다.
미국을 대표하는 경제학자인 로렌스 서머스 하버드대학 교수도 같은 이유로100달러를 폐지하자고 주장한다.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교수는 100달러권을 폐지하고, 순차적으로 50달러권과 20달러권까지 없애자는 생각이다.
앞서 고액권이 범죄에 이용된다는 이유로 캐나다(1000달러), 싱가포르(10,000 싱가포르 달러)도 최고액권을 폐지했다.
한국에서도 5만원권을 폐지하자는 주장이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다. 시중에 공급한 5만원권 중에서 한국은행 금고로 환수된 비율이 낮기 때문이다.
시중에서 유통되지 않는 5만원권이 그만큼 많다는 의미인데. 이를 두고 탈세 등의 범죄와 연관돼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일각에서 제기된다.
다만 한국은행은 코로나19로 전반적인 경제 상황이 위축되면서 현금 유통망도 함께 위축된 것뿐이라며, 해외 고액권에 비해 5만원권은 액면 가치가 낮고, 일상생활에서 활발하게 사용되고 있다고 설명했다.